요한 일서 2 장 | 드라마바이블 요한일서 2장 961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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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한일서 2장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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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3/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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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요한일서 2 ·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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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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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 KLB –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 Bible Gateway

요한일서 2. Korean Living Bible · 2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나는 이 편지를 씁 니다. ·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화해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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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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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 Pensées

요한일서 2장 ·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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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1/2/2021

View: 6805

2021/09/07(화) “요한일서 2:1-6” / 작성: 조광묵

본문 요한일서 2:1-6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요한 사도는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의로우신 대언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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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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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2월 3일. 요한일서 2장. – 하늘품은교회

요한일서 2장. 참된 성도의 시금석. 1. 사도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룹니다. 단 하나의 죄라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가볍게 대하고 가르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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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2/12/2022

View: 6976

요한 일서 2장 주석 – 요한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요한일서 제 2장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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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6/2022

View: 3891

요한일서 2장 1~5절 화목제물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2장 1~5절 화목제물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by ezrabible 2019. 9. 24. 1절.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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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zrabible.net

Date Published: 2/1/2021

View: 9614

요한일서 2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요한일서 2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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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edkjy.tistory.com

Date Published: 4/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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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일서 2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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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iVt-CK8c7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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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요한일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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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요한일서 2장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1)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2)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옛 계명과 새 계명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2)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2)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2장

요한일서는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늦게 저술된 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일부의 학자들은 요한계시록보다 더 늦게 쓰여 졌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도요한이 순교하기 직전인 AD 86년에서 90년 경에 썼다고 봅니다. 요한일서의 핵심은 ‘교제’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이고, 두 번째는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교제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1:7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2:2에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말합니다. 3:7에서는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또는 사귐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성도간의 교제 역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대속 사역은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3:16에서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4:7-10에서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그 근거를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것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귐과 사랑,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즉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을 사랑의 전제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사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서야 합니다. 요한은 계속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3:22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4:1-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 속했지만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로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의 핵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인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사역 때문이고, 예수님의 대속 사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5:20에서 요한은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6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7-17절까지는 서로 사랑할 때 새 계명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18-29절까지로,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1. 1-6절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2. 7-17절 새 계명 안에 거하라

3. 18-29절 누구에게 속했는가

1. 1-6절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먼저 요한은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음을 밝힙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절 중반부를 보십시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한 번 예수 믿으면 죄가 없어진다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다시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9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합니다.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시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안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헬라 철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단어입니다. 실제로 요한일서에서 정죄하는 초대교회 영지주의 분파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생에 대한 은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앎은 대단히 영적인 것이어서 육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육신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안다고 말하는 ‘기노스코’를 사용하여 ‘진정한 앎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우리가 죄가 사함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앎과 계명에 대한 순종은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니 요한일서를 읽을 때는 ‘안다’는 동사를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7-17절 새 계명 안에 거하라

7-17절에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을 구분하면서 새 계명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새 계명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곧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볼까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체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곧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미워하는 것은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가면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빛이 세상에 비추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요 1:5)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빛이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진리인 것을 압니다. 다시 요한복음 1:9-10을 봅시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다시 요한일서 2장으로 갑시다. 2:8에서 요한은 새 계명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복음이며, 새 언약을 말합니다. 그리고 빛에 거한다는 말은 진리에 거한다는 말이며,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말합니다.

12절, 죄 사함을 받는 것, 13절 악한 자를 이기는 것, 14절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 바로 예수을 믿는 믿음입니다. 찬송가 357장에서 있죠.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믿음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인데 그가 영원히 살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3. 18-29절 누구에게 속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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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7(화) “요한일서 2:1-6” / 작성: 조광묵

본문 요한일서 2:1-6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요한 사도는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의로우신 대언자 (1)

(1a)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자녀들아’는 말은 원어로 지소사 형태를 쓰고 있는데, 성경에서 요한만이 사용하는 특유한 표현입니다. ‘지소사’는 ‘애칭으로 짧게 줄여 부르는 말’을 의미하는데, 새끼 짐승을 부를 때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와 같이 작음이나 애정의 뜻으로 사용하는 접사입니다. 자녀라는 말이 이미 애정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지소사를 사용해 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게다가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고 하는 것은, 더욱 개인적인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요한일서는 주후 80-90년경에 연로한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한 이후에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기록하였습니다. 야고보가 44년경(행12:1), 베드로는 64-67년, 사도바울 67년경에 순교하는 등 이제 사도 중 마지막으로 요한만이 남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로한 요한이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눈에 성도들은 믿음의 길을 따라오는 자녀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생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사도로서 요한은, 교회가 당면해 있는 위험을 지켜보고 있었고, 믿음의 선배로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쓰는 목적 중 하나로,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고 난 후에 죄를 짓는 것은, 다른 양상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앙인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죄의 심각성도 알지만,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죄 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죄에 대한 패배주의가 자리 잡아 있습니다.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지만,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으며 정체돼 있습니다.

문맥적으로, 요한은 이 경우를 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대선배인 요한은 죄에 대해 낙담하고 실패감에 빠질 수 있는 교회에 말하고 있습니다. 1절 후반절입니다.

(1b)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초대교회 내에도 죄의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 분파와 당 지음, 간음, 거짓 가르침, 거짓 선동 등 죄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죄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 또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적인 문제이고 신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로마서는 7장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지만, 여전히 죄는 신앙인과 교회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서,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죄를 지어도 되는 면제부를 주는 것이 아닌, 죄로 인해 실패감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하는 말입니다.

‘죄를 범하여도’라고 번역된 ‘하마르테’는 부정과거 시상으로, 이미 죄를 짓은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이라고 하여 가정법을 쓰지만, 과거 시상을 쓰기에 이미 죄를 짓는 상태에 놓여있는 성도들과 교회에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언자’는 ‘돕는자’ ‘중재자’ ‘변호인’등을 의미하는데, 법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대언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변호인은 피의자의 범죄 사실이 명확한 경우에,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형을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위해 변론하십니다. 죄인이 무죄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것은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변호사들이 범죄 사실이 명확함에도 법리를 이용해 무죄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범죄자를 법리를 이용해 무죄 선고를 받도록 하는 것은 사회에서도 없어져야 할 부정부패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범죄자가 무죄선고를 받도록 대언하십니다. 그런 그를 의로우신 대언자라고 합니다. 어떻게 죄를 범한 사람이 무죄를 선고를 받도록 변론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입습니까? 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 (2)

(2a)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예수님은 우리 죄인를 위한 화목 제물이다고 합니다. 화목제물은 헬라어 원어로 ‘힐레오스’로 ‘신을 위로하고 진노를 경감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율법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더디게 노하시는 분이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진노하십니다. 심지어 민수기 14장 18절은 ‘여호와는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화목제물을 통해 그 진노가 제거될 수 있다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라고 그 죄의 사함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도 로마서 3: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은 범죄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아서, 그 진노를 무마시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자를 무죄하다고 증언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을 무죄라고 변론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장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되는 것입니다.

(2b)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만을 위한 화목제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죄 사함이 개인적인 체험과 종교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용기를 얻는 개인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되심은 주관적인 경험과 신념이 아니라, 전우주적으로 이루어진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요한은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죄의 문제를 보면서 낙담하고 패배의식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죄 사함과 죄의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지고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험이기 전에, 온 세상에 미치는 객관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속사’라는 설교에서 예수님의 희생제물로서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중보자의 일을 맡았고, 인간의 중보자로 오셔서 그 직분을 감당하기로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즉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직분을 감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을 향해 즉각 주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중보자가 없었다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자비도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직분을 철저히 감당하는 것으로 타락한 인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구원을 받는 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은 성도들에게 죄사함이 개인적인 경험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행하신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주관적인 상태와 경험으로 인해 죄에 대한 패배의식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됨을 말씀합니다. 3절에서 4절입니다.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하라 (3-6)

(3-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3절에서 안다는 단어인 ‘기노스코’는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관계적 체험이며, 동시에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다고 말합니다. 둘은 선후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체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실천이 나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주관적인 경험이,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실패감에 젖어 있을 때,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 먼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행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와 사귐이 있다는 증거와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어, 알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5-6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5-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죄에 대해서 넘어지고 또 그로 인해 실패감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행하신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힘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믿음의 대선배요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자녀 같은 교회에 이 편지를 쓰는 목적 중에 하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복되는 죄로 인한 실패감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교회에 포기하지 않아야함에 대해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서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대언자가 되심을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 된 상태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되심에 근거하여, 그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실천은 오히려 죄로 인한 실패감에 빠진 우리에게 더 큰 확신을 주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의와 정의를 행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죄에 대한 실패감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믿음, 사랑, 순종, 겸손, 자기희생을 지켜나간다면, 그로인해 ‘우리가 그의 안에’있다는 더 큰 확신을 얻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상태가 아닌,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 있음을 누리는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로 인해 넘어진 저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범죄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 앞에 대언자가 되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늘 죄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상태와 자질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죄에 대한 실패감과 패배주의로 인해 무기력한 신앙 가운데 있는 주님의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사도요한이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그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2.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는 목적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왜 그러한 목적을 가지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의 대언자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가 어떻게 의로우신 대언자 인지 묵상해 봅시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5. 죄로 인한 실패감 가운데 다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해봅시다.

(작성 : 조광묵)

매일말씀묵상. 12월 3일. 요한일서 2장. > 매일말씀묵상

요한일서 2장. 참된 성도의 시금석.

1. 사도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룹니다 . 단 하나의 죄라도 가볍지 않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가볍게 대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 사도는 성도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서신을 쓴다고 밝힙니다(1). 죄를 짓지 않는 최선의 방책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다면,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2).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1). 범죄할지라도 주님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언자와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2. 성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3). 주님을 안다는 것은 , 성경의 지식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 ,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아는 실제적인 앎입니다 .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그 계명을 지킵니다(3). 안다고 말하면서도 그 계명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입니다(4). 말씀을 지키고 살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해지고, 다른 성도들과의 사귐도 일어납니다(5). 참 성도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주와 동행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6). 계명을 지키고 사는 것은 성도 됨에 관한 하나의 시금석입니다.

3. 두 번째 시금석은 형제 사랑입니다 (7~11). 옛 계명 ( 레 19:18) 과 새 계명 ( 요 13:34) 의 차이는 , 예전에는 무능해서 할 수 없던 것을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입니다. 형제 사랑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존재 증명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근본적이며 본능적으로 형제를 사랑합니다 .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고 눈먼 자요 불신자입니다 .

4.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는 요소가 있습니다 . 첫째는 죄와 불의이고 (1:5~2:2), 둘째는 형제 사랑의 부족이며 (2:3~11), 셋째는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이고 (2:15~17),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2:18~27). 이것들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고침을 받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3:24).

5. 사도는 성도들을 세 부류로 분류합니다 . 아비 , 청년 , 아이입니다 . 이들 모두가 성도로서 가지는 전제가 있습니다 . 첫째는 죄 용서를 이미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12), 둘째는 죄는 극복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이고 (13~14), 셋째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13~14). 이들 모두에게는 세상과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권면이 주어집니다(15~17).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의 모든 방식과 체계를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필요에 예속되거나 , 식욕이나 성욕 같은 감각적 만족에 좌우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 안목의 정욕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 이생의 자랑은 자기 영광이고 교만과 허영인데 , 외적인 자랑에 사로잡혀 사는 태도입니다 .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15).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17).

6. 지금까지 내부의 적에 대해서 말한 사도는 , 18 절부터 외부의 적 ,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육체 부활과 육체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교리적인 혼란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하게 하심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20). 성령님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에게 주어져서 그들로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적그리스도는 계속해서 교회와 성도를 위협하고 미혹할 것이기에, 성도는 진리가 자신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24). 그렇게 되면 주님의 재림 앞에 부끄럽지 않고(28) 담대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사도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요한서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보십시오. 당신은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참되고 바른 길 위에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생명 같이 여겨 순종하고, 형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깊이 확신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 안에 굳게 서는 저희와 가정과 교회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 일서 2장 주석

요한일서 제 2장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

)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

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

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

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

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

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으 지속하는 그리

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

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

이 헬라어 ‘하마르테'(* )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

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 )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

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

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

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

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

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

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

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

온'(* )은 문자적

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

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

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

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

)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

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 )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

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

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

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

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

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

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

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 )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

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 , 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

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롬 13:8-10;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

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

라어 ‘기노스코멘'(* , ‘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은에서 전혀 사

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

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

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것이 아니

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

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

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

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

멘'(* )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

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

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

)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

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

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

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

)은 3절의 ‘테로멘'(* , ‘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

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

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폐기론을 주장하

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

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

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

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2:5

개역성경에는 ‘드'(*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과 연결

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그의 말씀'(*

, 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

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

)는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

)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

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Schnackenburg). 본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

)는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

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

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

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

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2:6

저 안에 거하는 자는. –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

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

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 )는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

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

어 ‘페리파텐센'(* )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

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

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2:7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

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나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

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

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

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

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

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 )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

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

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

는 헬라어 ‘에쿠사테'(* )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

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2:8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 )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

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

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

(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

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

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

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

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

하는 헬라어 ‘파이네이'(* )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

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

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우네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 )은 문자적으로 ‘말하

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

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

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

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

이며 진절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

로 수신자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

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

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

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

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

)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

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

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

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

)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

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

(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셩젤마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

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

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2:12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

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다(렘 31:34;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행 4;12;10:43;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

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

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

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

(*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2:13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

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

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

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

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

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

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 )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

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

(* )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

하고 통제한다(14절;3:12;5:18, 19;요 17;15;엡 6:16;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

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

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

)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골 2:15;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

(Stott, Smalley).

=====2:14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 ‘아이

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

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

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

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

을 나타낸다(Barker).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

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

이'(* )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

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

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

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

(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

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

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

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

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

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

)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

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

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

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

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

(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 )는 일

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

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

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

,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

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

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

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

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

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들이 세사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

크'(* )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

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

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

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

라.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

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

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

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14;5:11, 12;고후 4:18).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

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

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

때'(* , 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

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

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

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

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

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4:21;7:30;8:20;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

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

)는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

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

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

, ‘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

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 )를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

Smalley).

=====2:19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

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

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

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

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

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

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 ‘왜

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

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

)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

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

‘(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

스'(* )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

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

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

(Smalley).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

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41;사

1:4;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15:26;16:7;행

2:27;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

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

‘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요 14:17;15:26;16:13;행 4:27;10:38;고후 1:21,

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

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

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중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

)는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

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

‘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

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

다.

=====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

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본절은 세 개의 ‘인함이

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 )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

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

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

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

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

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

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

가…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

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

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

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

언한 요한은 본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

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

도 있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에케이'(* )와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

)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

‘메노'(* )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

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

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

2절;요 14:6).

=====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 (

, 휘메이스 호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엔 휘민 메네토). ‘처음

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

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 )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

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

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

)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

‘에 해당하는 ‘엔 휘민'(* )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

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

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

, ‘들은’)가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보다 앞에 기

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

조하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

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

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

)는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

한다(Smalley).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

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

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야이신 예

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롬 15:8;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

이라고 말한다(갈 3;16;엡 2:12;히 10:23;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

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행 1:4, 5;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딤후 1:1;딛

1:2).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

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

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2: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 )은 현재 분사

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

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

)는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

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방

식이다.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24절에서 ‘처음부터 들

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

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

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

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4:1, 5;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

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

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

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

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

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참되고 거짓

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

)는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 . ‘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

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

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

어 ‘에디닿센'(* )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

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

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

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

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 )

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 )를 연결시켜서 그리스

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

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

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

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

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

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

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

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

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

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

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안

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

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

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요한일서 2장 1~5절 화목제물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1절.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은 이 서신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치 않기 위한 목적으로 편지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염두해두고 죄를 지었을때의 대비책도 함께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는 죄를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함으로 더욱 더 죄 앞에 두려워 떨게 하게 한다. 온전한 의로움 앞에서 죄인은 두려워하고 의인은 더욱 의로움을 갈망하게 된다.

2절.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대언자,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소개한다. 신자는 이러한 두 단어에서 더욱 더 경외감과 죄에 대해서 멀어지게 되고 ‘의’를 더욱 사모하게 된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가까워지도록 예수께서 날 위해 친히 목숨 받쳐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고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죄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3절.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반드시 계명을 지켜내는 열매를 보인다.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범위와 분량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분명한 건 그 열매들을 사람들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4절.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입술의 고백, 간증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행동과 삶의 기본적 태도에서 전혀 변화가 없는 이들에 대해서 성경은 ‘진리’가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록한다. 겉으로 표현하고 이해하여 말할 수 있지만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치 못한 이들은 회심한 자들이 아니다.

5절.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누구든지’라면서 시작된다.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 회심한 이들은 성경의 말씀이 삶으로 나타내는 결과(열매)를 반드시 보여주게 되어있다. 내 삶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한번도 나타난적이 없다면 나는 구원받은 자가 아닐 수 있다.

6절.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의 안에 산다’,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다양한 영적 공급이 우리의 몸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보여지는 열매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함께 사는 사람은 그 함께 사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이 몸에 배여있게 된다.

요한일서 2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요일]2:1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는 의로운 분이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요일]2:2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으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모든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2:3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할 때, 진실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일]2:4 하지만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을 알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이 명령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요일]2:5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해야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 됩니다.

[요일]2:6 누구든지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요일]2:7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계명이며, 이미 들어 보았던 가르침입니다.

[요일]2:8 그러나 나는 분명히 새로운 계명을 쓰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은 지나갔고, 이제는 진리의 빛이 밝게 비치고 있습니다.

[요일]2:9 “나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요일]2:10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잘못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요일]2:11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어두움 속에 살면서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를 눈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일]2:12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일]2:13 부모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그분을 당신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악한 자와 싸워 이겼기 때문입니다.

[요일]2:14 자녀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태초부터 계신 그분을 당신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살아 있으므로, 여러분은 악한 자와 싸워 이겼습니다.

[요일]2:15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게 됩니다.

[요일]2:16 이 세상에는 악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우리들의 삶에 대해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요일]2:17 이 세상은 지나갈 것이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것들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그리스도의 적

[요일]2: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올 것이라는 말을 여러분은 들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일]2:19 그 적들은 우리의 모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우리 모임의 일부분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떠나갔고, 이 사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일]2: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이 주신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요일]2:21 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여러분이 정말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진리로부터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2:22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도, 그의 아들도 믿지 않습니다.

[요일]2:23 누구든지 아들을 믿지 않으면 아버지도 잃게 되고, 아들을 인정하게 되면 아버지도 얻게 됩니다.

[요일]2:24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를 계속하십시오. 그 가르침 안에서 계속 살아갈 때, 여러분은 아들과 아버지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요일]2:25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것,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요일]2:26 나는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요일]2:27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선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계속하십시오.

[요일]2:28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필요도 없고,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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