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8 장 | 요한복음 8장 193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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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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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요한복음 8 ·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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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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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한복음 8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요한복음 8장 ;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33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35절 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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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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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KLB – 간음한 여자가 용서받음 – Bible Gateway

간음한 여자가 용서받음 –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다시 성전으로 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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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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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20171001 본문 / 요한복음 8:1~12 본문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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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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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4(금) “요한복음 8:12-20” / 작성: 정한조

본문 요한복음 8:12-20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예수, 빛이심을 선언하시다(12절)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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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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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 문제와 해설]

요한복음 8 장. 1. 예수를 고소하려는 사람들이 무슨 건덕지라도 잡을 심산으로 간음한 여자를 잡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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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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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요한복음8장:간음중에 잡혀온 여인,세상의 빛되신 예수님 …

감람산은 공관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수님만의 주요 공간인데 요한복음에서는 8장1절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때에 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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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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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우리말성경) / 다니엘성경 – genie – 지니

요한복음 8장 (우리말성경) – 09:40. 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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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enie.co.kr

Date Published: 7/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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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죄인 취급 받는 이들은 이웃과 말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저 함부로 뿜어대는 독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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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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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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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8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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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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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2020/07/24(금) “요한복음 8:12-20” / 작성: 정한조

본문 요한복음 8:12-20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예수, 빛이심을 선언하시다(12절)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 7장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두 번째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유월절에서 6개월 후에 있는 초막절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에는 중요한 행사가 2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실로암으로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도 순금 항아리를 들고 동행하여, 실로암의 물을 담아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긴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수문(water gate)으로 들어와서,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초막절이 지나면 보리를 파종해야 하는데, 그때 비를 내려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기에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라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치셨습니다.

초막절에 행한 또 하나의 행사는 ‘등놀이’였습니다.

초막절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4개의 금 촛대가 높이 세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을 켜면 전기가 없던 당시에 그 주변이 환해져서, 그 불빛 아래에서 여인들이 바느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삶에 빛이 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의 끝날을 ‘큰 구원의 날’로 여겼습니다. 그날도 다 끝나갈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의 양을 치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그 부르심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입니다. 이 표현과 “나는 세상의 빛이다.”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표현하면, “나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입니다.

12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더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다’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같은 길에 서다’입니다. 당시 이 동사는 3가지의 경우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군인이 자신의 지휘관을 따른 경우와 노예가 주인의 뒤를 따르는 경우 그리고 제자가 스승을 따를 때입니다. 만군의 주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지휘관이시고,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구원의 주인이시며, 그 어떤 스승과도 비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질곡, 죄의 진창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게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열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습니다. 그 열매를 먹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될 것만 같았고, 하나님과도 견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빛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각광(脚光)을 받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빛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고, 그 결과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죽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에서 단 12명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랐지만, 빛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밤에 나가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따를 때만 어두움은 어두움이 되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올바른 분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시다(13-19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을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 ‘나는 세상의 빛이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이 빛을 얻으리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목수가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4-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갈릴리 나사렛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자 목수로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 일 수가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감을 따라서 예수님을 판단했고, 모든 사람을 다 판단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분명히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닌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있고, 또 분명히 보고 들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중에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틀릴 수 있고,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하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적자, 비난자, 비판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바르게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므로 친히 주님의 증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신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옳다고 인정해 주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변 이후에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과 사람들은 “당신의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오?”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중의적입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팔아 당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 마시오.”의 의미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버지(목수 요셉)는 이미 죽지 않았소.”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영적으로 생명의 빛 속을 거닐고 있지 아니하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시다(20절)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약간 의아하게 보이는 단어, 하지만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킴 중에는 철저한 헌금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온전한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뿐만이라,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리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 먹기 위해서 마당에 있는 밭에 심은 채소와 조미료 역할을 하는 식물의 십일조까지 드리려고 했습니다.

당시 성전 중 여인의 뜰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넓은 입구에서 내려갈수록 좁은 통로의 함)이 13개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거기에 헌금을 넣을 때, 헌금이 들어가는 소리가 자신의 의를 더욱 굳게 세워준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바치는 헌금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재물이 필요하시기 때문이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이며, 헌금의 종류와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진리와 생명에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도, 단지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만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며 탄식하곤 하셨습니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드려야 할 본질적이고 올바른 헌금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헌금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보다 더 바른 헌금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헌금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내면, 우리 자신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게 여겨져도, 또 우리가 연약한 아이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길을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은총 속에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기에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빛이 되시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철저한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만 해도 빛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을 과대포장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헌금과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쉴 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매일매일을 밝혀 주시옵소서. 오늘도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조명 아래에서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되었거나 주님을 외면하다가 어두움에 빠지게 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2.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또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교정되었습니까?

3. 당신이 주님께 드리고 있는, 또 드리고 싶은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4.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며,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정한조)

10. 요한복음8장:간음중에 잡혀온 여인,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진리안에서의 자유,예수님의 증언

10. 요한복음8장:간음중에 잡혀온 여인,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진리안에서의 자유,예수님의 증언

1. 감람산은 공관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수님만의 주요 공간인데 요한복음에서는 8장1절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때에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이 되면 감람산에서 기도와 휴식을 취하였습니다.(마가복음11:11,13:3,누가복음21:37,22:39)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맞은편에 있는 해발 800미터의 산으로 올리브나무(감람나무)가 무성하여 감람산이란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2~5. 아침이 되면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다시 성전으로 들어 오셔셔 말씀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나아온 것으로 보아 전날에 이어 연속적인 강의가 진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뜻하지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편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선가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체포하여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동안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던 음모를 찾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있어서 간음한 여인은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강론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중지할 만한 위급한 상황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의 경우 남여 모두를 성문에서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 사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레위기20:10,신명기22:22~24)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며 예수에게 이 여자를 어떻게 할지 묻고 있습니다. 용서함으로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든지, 죽임으로 로마법에 위배되든지, 두가지 문제가 상충하는 간음하는 여인에 대한 판결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6~8. 예수께서 땅에 무슨글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곤혹에 빠뜨린 바리새인들의 비웃음과 고조된 군중들을 안심시키려 한 것인지 아니면 지혜로운 해법을 적은 것인지 우리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한번 동일한 질문을 하였을때, 예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사람부터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땅에 무엇인가를 적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현장을 목격하고도 빌미를 잡기 위해 그것을 방조하였습니다. 그 행위 또한 모세의 율법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었습니다. 이제 공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볼때 의인이라고 자부할수 있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재판관이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할수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다른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은 어느 재판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9~11. 그래서 젊은 사람으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물러가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불과 조금전까지만 해도 한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손에는 한사람을 심판하기 위한 돌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변호에 재판관을 자처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고 자리를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물러가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 두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러가지 않은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남아 계셨던 것은 유일한 의로운 재판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3장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구원을 위하여 직접 변호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호는 모세의 율법조항을 극복하고 모든 심판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함으로서 일시에 잠재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위하여 재판장이 되셔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무죄석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이리로 끌고와서 고발하였던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였던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느냐?” 여인은 “주여, 이곳에는 주님외에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이곳에 남아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변호인인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주신 재판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네가 사는 곳으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린도후서5:17)고 용서와 함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어둔 죄악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막절 기간중 출애굽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한 사건(출애굽기13:21~22,14:19~25)을 상징하기 위해서 4개의 황금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여인의 뜰” 광장의 사다리에 올라가 황금촛대에 점화하여 온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어둔 죄악속에 머물러 있었던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었는지 알수 없지만 구원의 빛으로 상징되었던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초막절 예루살렘을 비추는 황금촛대를 수만배 능가하는 빛으로 온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이사야60:19~22,에스겔1:26~29) 생명의 빛은 일시적인 빛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쫓았던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빛은 잠시 밝았다가 꺼져 버리는 횃불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하는 완전한 빛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4~5,마태복음5:14)

13~14. 바리새인들의 지적은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하여 말한 것이 어떤 증거적 효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증거적 효력은 다른 두사람 이상의 증거가 명확할때 참된 증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스스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것도 인정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지적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거는 사람들의 증거와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언할 자로서 자신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신비한 관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거나 설명할수 있는 지혜로운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모른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15~16.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나사렛출신 목수의 아들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일반적인 교회의 열심있는 평신도 정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않는 것은 판단능력이 없거나 판단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판단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더이상의 구원이 유명무실해 질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판단하였을때 그 모든 판단은 참된 정의가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10장30절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라는 보다 진전된 표현으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17~18. 구약성경의 율법에는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두사람의 증거가 필요하였습니다.(민수기35:30,신명기17:6) 예수께서는 이러한 율법에 의거하여 두명의 증인을 내세워 그 정당성을 입증하였습니다. 첫번째 증인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증인의 효력이 없으나 예수님은 완전한 자로서 증인의 효력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두번째 증인은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분으로 성부 하나님 이십니다. 즉, 성자예수님이 완전한 인간 예수님을 증언하고 성부하나님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무슨말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습니다.

19~20.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너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증인이 될수 없고 자격상실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영적으로 말씀하실때에 바리새인들은 육적으로 생각하고 육적으로 답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영적무지와 패악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면서 만약에 나를 제대로 알았다면 너희들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습니다.(요한복음1:19)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태복음11:27)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얼마나 많은 수모를 느꼈을까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기를 모르는 것은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는 유대인 여인의 뜰안 나팔모양을 한 13개의 연보궤가 놓여있는 곳으로 헌금과 헌물을 하는 예배자들의 출입과 왕래가 많아 예수님의 설교장소로는 매우 유익한 곳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산헤드린 당국자 회의장소인 성전내실과 인접하여 지극히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21~22. 예수님은 작심한듯 말씀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내가 간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여러번 언급된바 있습니다.(요한복음7:33,13:3,14:28,16:5) 바리새인들은 예수만 죽이면 모든 것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부활과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하마르타하”(ajmartiva), 즉, 죄는 단수형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빌미를 찾고 계략을 꾸미고 하는 모든 과정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가시는곳에 바리새인들은 결단코 올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결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결은 유대사회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으로 아주 큰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3~24. 예수님의 말씀은 난해함을 더해가며 유대율법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을 무색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아래에서 태어나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위에서 존재하여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지만 세상 그 어떤 것으로 부터도 오염되지 않았고 그것으로 부터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 분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회개할 기회를 수차례에 걸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그래도 내가 메시야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하마르티아이스”(ajmartivai)는 하마르타하의 복수로 원죄와 믿음이 없는 모든 죄와 자신들이 지은 죄를 모두 포함하여 죽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만(요한복음3:15~16) 예수를 믿지 않은자에게는 죄의 삯인 영원한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로마서6:23)

25~27. 예수님의 반복되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네가 누구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이같은 질문은 비아냥, 조소일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변함없는 우매함앞에서 예수님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는 최초의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처음”은 “아르케”(헬라어)로 태초부터 계셨다는 예수님의 선재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1)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는 패역의 바리새인들의 변화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이미 판단하고 계시고, 그것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말들을 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오신 목적을 상기하였습니다.(요한복음15:15)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그 어떤 말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28. “휩소오”(uJyovw)는 “높이다, 들어올리다”라는 의미로 “인자를 든 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승천을 함께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놋뱀을 장대위에 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살았던 사건을 말씀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민수기21:9) 이렇게 모든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을때 그제서야 바리새인들은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이미 늦어버린 후회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스스로 어떤 행위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행하고 말씀함으로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한치의 어김없이 실천하고 있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9~30. 예수님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항상 함께 하고 있슴을 선포함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자를 치유하며,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6:39)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가 복음전파를 위하여 모든 정성을 다하고 힘을 기울일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마태복음28:18~20)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많은 유대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것은 아니었습니다.(요한복음8:30~59)

3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나의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너희를 죄에서 해방하여 자유롭게 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유대인이 갖고 있는 믿음의 상태는 참신앙이 아니라 단순하게 믿는 것으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껍질과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메이네테”(meivnhte)는 “거하면, 함께살면”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일체로 믿으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2.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직접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14,14:6)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7:17) “엘류데로오”(ejleuqerovw)는 “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 면제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곧 진리로서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슴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통제하였던 율법은 금지와 처벌에 관한 규정으로 모든 유대인들의 삶을 규제하고 얽메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안에서의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로마서8장2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예수께서 그 믿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단어는 생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가난에 쳐해 있을지라도 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종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사라에게서 난 이삭의 정손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긍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독립적인 국가를 이룬적이 다윗시대를 제외하고 거의 없었습니다. 애굽나라에서 400년이상 노예생활을 하였으며 느헤미야 시대에도 바벨론 포로로 오랜 세월을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그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아래 유대인에겐 자유가 구속되고 로마의 통제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앞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앞세웠습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이 지금도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무슨 자유를 말하는가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34.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를 두번씩 반복하면서 “죄의 종”을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로마서3:23,6:16,7:14) 죄를 범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는 속성은 “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주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어떤 방도도 없는 세상에서 죄의 종된 자들을 그대로 방치할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로 부터 자유할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35. 그것은 종이 갖는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종은 영원히 주인집에 거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집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나간것과 같이(창세기21:8~21) 죄의 종인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종들은 경우에 따라서 주인집에 생활하다가 추방되거나 다른 집에 팔려가기도 하지만 주인집의 아들인 경우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의 신분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과 결과가 도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적 특권만으로 영원한 축복을 꿈꾸는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36. 이스라엘의 노예들은 6년이 지나면 해방될 수 있고 희년에 의해 50년이 되는 해에도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는 제도가 있었지만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21:2~6,신명기15:12~18,레위기25:10,예레미야34:8~22) 초대교회 당시 한 집안의 가장은 물론 장성한 아들도 종의 신분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기반으로 말씀하셨는지 알수 없으나 자신에게 백성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권한이 있슴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가 참된 자유이며 이로서 죄의 멍에와 속박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구원의 백성들은 더이상 악한 정욕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로마서6:11~14)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는 더욱더 그를 지배하고 죄에 탐닉하게 됨으로서 벗어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입니다.

37~38.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1:12~13)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불신함은 물론 배척하고 더 나아가 죽이려는 음모와 계략을 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실현에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있을 곳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계가 정반대로 대척점에 서 있슴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과 아버지로 부터 들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39~40.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서 존경하였지만 그의 삶을 유산으로 이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면서 영적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이 보았을때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행한 것이 무엇인가 되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행하거나 행하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행위와 어떻게 구별되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사람이라고 칭한 유일한 구절이었습니다.(요한복음8:40) 신약성경에서 사람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중보자(디모데전서2:5)로서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지금 죽이려 하고 있고 이같은 행위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할 짓인가? 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1.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출신성분을 이야기 하며 예수님의 질문에 반박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음란한 부모로 부터 출생하지 않았고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버지는 한분 하나님이라고 공박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진정한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고 하는데서 자신들은 혈통적으로나 영적으로 순수성의 결백을 말하고 있습니다.

42~43.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말에 심각한 모순이 있슴을 지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말대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로 부터 나오셨슴을 나타내는 기독론의 근본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확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마음속에 담아 둘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이 지적능력이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44.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작심한듯한 인상을 줄 만큼 충격적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버지 마귀에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아버지도 욕심대로 행하였고 너희들도 그렇게 행하고자 하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 진리가 없고 거짓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①”디아볼로스”(diavbolo), 즉, “마귀”(Devil)라는 단어는 “중성자”(Slanderer)로 사탄을 마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을 중상모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3:2,요한계시록12:10,욥기1:9,누가복음22:31) ②”파괴자”로 지칭되는 마귀는 히브리어로 “아마돈”(abaddon)이며 헬라어로는 “아 볼루온”(Apollyon)”인데 창조주 하나님과 하시는 일에 대한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파괴의 신이 된 것입니다. ③마귀를 “유혹자”, 또는 “미혹자”라고도 하는데 사탄은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시험하고 평가하며 악한길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④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과 신”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요한복음12:31)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그가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 대하여 두가지 명칭으로 사역과 속성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세력을 잡고 범죄한 인간위에 군림하며 사망과 올무로 가두려 합니다.(히브리서2:14) 또한 마귀는 거짓말하는 사기꾼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교활한 간계로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에 이르게 합니다.(고린도후서11:3) 그러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며(요한복음10:10),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으로(요한복음8:32)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14:6)

45~47. 예수께서는 놀랍고 비밀스러운 진리를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빌미를 죄로 엮어 체포하려는 속셈만을 갖고 있어서 진리를 말하여도 믿을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슴을 탄식하였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성인 허위성을 가진 적대자들의 특징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들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순종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이들과 함께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으로서 그 어떤 구원도 주어지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8~49.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는 길어질수록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끝내는 욕설과 같은 단어들이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패악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마귀에게서 낳다고 말하는데서 충격을 입은 그들은 역으로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과 귀신들린 자로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사마리아인과 귀신들린자는 가장 심한 욕설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사마리아인이라 칭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전통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복음15:1~2)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귀신들렸다는 말이 4회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7:20,8:48~49,10:20)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함으로 성령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의 언행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50.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요한복음12:28)

51. “테레오”(threvw)는 “지키다, 준행하다, 붙들다”라는 의미로 요한복음에 18회, 요한일서에 7회, 요한계시록에 11회 사용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로마서6:23)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은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의 죽음이 도래하지 않습니다.(요한일서1:7) 우리가 표면적이고 일시적으로 겪게되는 고난과 죽음은 영원불멸의 관계속에서 하나님과 지속되는 연속성에 비교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52~53.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귀신들린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이미 죽었거늘 예수의 말대로 지켜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인가? 선지자들도 함께 죽고 없는데 너는 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질문의 요지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상태로 말하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54. 예수께서는 내가 나 스스로 나에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닐 것이지만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분이 내 아버지 하나님이라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며, 내가 말하는 내 아버지가 바로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분이라고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성, 통일성을 가지며 아버지라는 칭호가 사용되지만 유대인들에게서 하나님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5.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찾지만 정작 그분을 체험하지 못하고 진실로 알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알고 계심을 말씀하면서 만일 내가 모른다면 나 또한 유대인들과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라고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56~59. 아브라함이 크게 즐거워 한 것은 자기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22:17~18)(히브리서11:13) 그러나 아브라함 시대로 부터 예수님 시대까지는 2천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네가 아직 50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인데 아브라함을 본다는게 무슨 말인가?하며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전혀 말이 되지 않고 여전히 귀신들린 사람같은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말씀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과 영존성때문이었습니다. 전혀 납득하거나 이해할수 없는 신성모독과 같은 예수님의 발언에 매우 분노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감지한 예수께서는 곧바로 숨어서 성전을 빠져 나갔습니다.

음악, 그리고 설레임

요한복음 8장 (우리말성경) – 09:40 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사람들 앞에 세우고 4.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신22:22-24 6.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린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7.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8.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제일 나이든 사람부터 하나 둘씩 슬그머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예수와 거기 홀로 서 있던 여인만 남게 됐습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들은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11.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는 세상의 빛이심] 12.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증거하니 당신의 증거는 진실하지 못하오.” 1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비록 내가 나를 증거한다 해도 내 증거는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대로 판단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그러나 내가 판단한다 해도 내가 내린 판단은 옳다. 그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거하면 참되다’고 기록돼 있다. 신17:6;신19:15 18.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증인이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 또한 나를 증거하신다.” 19.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 있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내 아버지도 모른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20.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헌금 궤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진리와 자유]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떠나갈 것이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이에 유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자살하려나?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인가?” 23.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너희가 ‘내가 곧 그’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5.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26. 내가 너희에 대해 말할 것과 판단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며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27.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8.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그’임을 알게 되고 또 내가 내 뜻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 그분이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시는 것은 내가 항상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31. 예수께서 자기를 믿게 된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 말대로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어느 누구의 종이 된 적도 없는데 당신은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3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다. 35. 종은 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머물러 있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안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고 있다.” [아브라함 자손과 예수] 39.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약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너희도 했을 것이다. 40. 그러나 지금 너희는, 너희에게 하나님께 진리를 듣고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41.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43. 어째서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버지인 마귀에게 속해 있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 안에 서지 못한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기 본성을 드러낸다.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45.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46. 너희 가운데 누가 내게 죄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째서 나를 믿지 못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듣지 않는 까닭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며 귀신들렸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옳지 않소?” 4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너희는 나를 멸시하는구나.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위해 영광을 구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심판자시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이 말씀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니 53.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다는 말이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소. 당신은 대체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오?” 5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내 영광은 헛된 것이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바로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내 아버지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만약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와 같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나는 분명 아버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기뻐하다가 마침내 보고 기뻐했다.” 57.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50세도 안 됐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5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예수께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해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제목 : 독백으로 살지 말고 대화로 살라

본문 : 요한복음 8:1-11

팬더믹 기간 중에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처음엔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가 생겨 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 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생각들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이 다릅니다. 자연히 갈등이 생기고 다툼의 소지는 여전합니다. 서로 조심한다고 하지만 깨지는 소리가 요란 하기만 합니다. 갈등과 다툼의 발단은 바로 말 한마디가 문제의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사실 대화의 첫 걸음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는 첫 마디는 대화가 물 흘러 가듯이 잘 진행되게 합니다. 하지만 배려나 이해하는 마음이 없이 무턱대고 화를 내고 신경질적인 첫마디는 혼자 떠드는 격이 될 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조롱받는 죄인들도 많았습니다. 만약 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목격 되면 똑같이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는 이들은 이웃과 말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저 함부로 뿜어대는 독백에 무시 당하고 살뿐이다. 세상은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 조차 아주 싫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바라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상대방을 향한 대화의 첫걸음은 굉장히 온유 합니다. 예수님은 죄는 미워 하시지만 죄인을 향해서는 긍휼로 품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간음하다 들킨 여인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질질 끌려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적발해서 붙잡아 왔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진정한 숄루션을 얻기 위해 질문한 게 아니다. 한 여인을 미끼로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악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악한 심중을 아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합니다.

그랬더니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슬그머니 하나씩 쏜살같이 사라집니다.

저런 인간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웅성 거리며 떠들석했던 순간은 지나 갑니다. 어느새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

예수께서 여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를 고발하려고 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여인이 대답을 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집고 넘어 갑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향한 용서의 마음은 풍성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대화를 보면서 몇 가지 교훈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대화의 첫 걸음이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꺼 번에 몰려와서 한 여인을 난도질을 합니다. 여럿이 몰려와서 한 사람에 대해서 온갖 비난과 정죄를 쏟아 붓는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왔을 당시에 이 여성에게 몸을 씻거나 몸을 가릴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여인을 앞에 세워 두고 온갖 모욕을 줍니다. 예수님에게 그녀의 수치를 드러내게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고발할 건덕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한 여인의 수치와 모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위배가 되는 큰 죄를 범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현장 한 복판에 버젓이 세워두고 독백만 할 뿐이다. 독백이라면 상대방을 앞에 세워 두고 혼자 지껄이는 말투 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인을 앞에 세워 둔 채.. 예수께 질문 합니다.

이런 자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돌려 쳐 죽어야 한다. 공식대로 산다. 여기엔 은혜는 없다. 공식대로 간음한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지배적이다. 이들에게서 긍휼의 냄세는 전무 하다. 그저 잔인할 뿐이다.

여인을 향해 마구 쏟아 붓는 말들을 모습을 보면서 욥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욥이 까닭없이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때에 친구들이 우르르 찾아와 무슨 말을 하나요.. 하나님은 욥에게 까닭없는 고난을 주셨건만.. 친구들은 너가 죄를 범해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친구들이 얼마나 욥의 가슴을 후벼 팠으면 욥이 뭐라고 말하나요..욥 19:2에 “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욥은 친구들을 향해 짓부수기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얼마나 후벼 팠으면 이런 말을 할까? 계속해서 욥은 말합니다. 욥 19:22에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욥이 친구들에게 한 말이 뭔가요? 제발 하나님 노릇좀 하지 말라.

예를 들어 친구 셋 이 와서 누가 심한 말을 하면, 상식적으로 좀 말리거나 해야 하는데 같이 덩달아 욥에게 칼로 상처난 곳을 후벼 파내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도 보세요.우리도 하나님 노릇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좀 잘못이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온갖 말들로 더 힘들게 합니다 . 박살을 냅니다. 비단 한 아이가 잘못이라도 하면 부모는 한 가지 대답만 듣고 싶어 온갖 부질없는 말을 쏟아 붓습니다. 그 한 가지 답변을 얻기 위해 “왜 그랬어” 윽박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대화로 어떻게 되었는지 자초지종 물어 볼 인내는 없다. 그저 온갖 욕설과 비난의 말을 쏟아 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합니다. 그럴수록 당사자는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다.

오늘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과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들었던 돌을 내려 놓을 수 있겠는가?

먼저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과 대화에서 보여준 ABC 를 보라.

우선 간음한 여인을 멀리하지 않는다. 결코 간음한 여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간음한 여인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은 향해서 비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죄인을 비난하러 오시지 않으시고 죄인 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다. 마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니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용서하시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부여해 주십니다 .요 8:11에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대화의 abc는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침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익숙한 말투의 습관을 보라. 상대방을 향한 대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있나요? 나는 대화로 시작한다고 하지만 내 안에 바리새인적인 생각이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 어느새 내 자신은 상대방을 더 코너로 몰아 붙이는 독백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독백의 말들을 한번 나열해 보자.

“너 이리와 바”.. 벌써부터 우리의 시작은 강압적이다.

어느 누구에나 “야 임마 넌 맨날 그 모양 그 꼴이냐”.. “내가 그럴줄 알았지”.. “넌 잘하는 게 뭐야” 상대방을 향해 인격적으로 모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 상대방을 버젓이 세워 놓고 독백만 한다.

그렇게 당당했던 바리새인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당당했던 자들이 어른 들로부터 얼른 그 자리를 피합니다. 어른들.. 오랫동안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어른들이 쏜살같이 사라져 버린다.그 순간 자신이 돌을 들고 있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린다. 겉은 노련미 넘치게 보이지만 자신들이 들고 있었던 돌을 순간 남몰래 감추거나 누가 볼까봐 서둘러 버린다.

여기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양심이 워킹한다. 말씀이 내 안에 없을때는 양심이고 뭐고 없다. 그저 자기 욕망과 탐욕에 허덕일뿐이다.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양심이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왜 이들은 그렇게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도망쳐 버렸을까?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토대로 해서 답을 얻어 보자.

표리 부동한 사람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정죄하는 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 지칭하는 용어 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며 삽니다. 소위 내로남불 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좋게 해석 합니다 .하지만 남을 향해서는 너무나 날카로운 칼을 들이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와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일에 다 참견하고 남을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무시 하며 깔보는 사람, 늘 부정적인 말, 비아냥 거리는 말, 남의 의견을 짓밟아 버리기를 밥먹듯이 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실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너무 의로운 척 했습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의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평가 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얼마나 챙피했을까요? 스스로 의로운척 하고 말로 자신의 존재감은 드러내려고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독사의 자식들아 ..

둘째, 아무리 돌에 맞아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자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말문을 열라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다독인다. 질타로 시작하지 않는다. 다독이는 이유는 하나다. 넌 내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죄 짓고 산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는 닫혀 있던 여인의 마음을 열게 하는 신호탄이 됩니다 .대화는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독백하며 간음한 여인을 무턱대고 정죄합니다. 그럴수록 마음의 빗장을 더더욱 단단하게 채울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뭐라고 말씀 하시나요?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 대화는 분노와 억울함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나는 정죄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데 주님은 정죄하지 않고 돌을 내려 놓으라고 합니다 .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들이 예수님과 때론 부닥칩니다. 예수님을 향해 왜 저런 인간을 가만히 나 두시는지 의아해 한다.

나는 너무 성급한 말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무턱대고 야단과 질타 보다는 다독이면서 대화의 첫걸음을 열면 어떨까? 소리 친다고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게 아니다. 난리 친다고 배우자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난리치고 화를 낸다고 대화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화병만 쌓여갈 뿐이다.

고개를 숙였던 여인.. 그런데 이제는 얼굴을 든다 그리고 예수님께 주여 라고 답을 한다.

우리는 한 가지 틀에 너무 매여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공의와 법으로만 처리하지 않으신다. 사랑과 은혜로 대하신다. 빌 4;5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인은 입을 연다.

여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여인은 이 분은 날 존중해 주는 구나..나 같은 쓰레기같은 인간조차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구나..하는 느낌을 받으니까 마음의 문을 활짝엽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태도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을까요?죄인들이 예수님께 이끌렸다는 점입니다 .죄는 미워 하지만 죄인을 향한 끌어 안음입니다. 그들의 죄가 사람들의 눈에는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심각한 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엄청난 죄를 용서 하십니다 .

주님은 죄인들에게 다가 갑니다. 무턱대고 야단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아픈 심정, 그들이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죄인들의 마음을 열수 있었을까? 아무리 내가 죄인들의 친구로 왔다고 말을 하지만 쉽게 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죄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비결은 먼저 이해다.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이해가 앞설 때에 상대방의 닫혀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린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했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이 너무 강하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들,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이해심이 너무 낮다.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상대방만 나무란다. 그러다 보면 독백만 할 뿐, 대화는 없다.

독백은 자기 앞에 인격적으로 대해야 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얘기만 계속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상대방이 왜 이렇게 했는지 에 대해 들으려는 태도는 안중에 없다 . 내 생각에 어긋난 것, 내 뜻대로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분풀이만 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런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없다.

관계 속에서 일방 통행만 주장하는 독백에 머문다면 관계는 더욱더 악화될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만 쌓여갈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더 곪게 할 뿐입니다 .

예수님을 통해서 보자.

우리는 이런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 보자

외형적인 것만 보다 보면 더 중요한 내면을 무시하기 쉽다. 죄에 눈이 멀면 죄인을 함부로 대하기가 쉽다. 스스로 의로운 척 하면 공의만 강조할 뿐 은혜의 깊은 맛을 맛보기 어렵다. 좀더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 지자. 난 공의만 알았지 은혜는 몰랐음을 인정해 보라.

죄만 보았지 죄인을 향한 이해나 배려가 턱 없이 부족했음을 인정해 보라.

무턱대고 소리 친다고 소리 지른다고 상대방이 입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입을 닫을 뿐이다. 마음의 문은 더 깊게 닫을 뿐이다.

마지막, 독백으로 살지 말고 대화로 관계를 만들어 가라

독백은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하지만 대화는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합니다.

자신의 대화 습관은 어떠했나.. 어느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버럭남 버력녀..라고 씁쓸한 별명이 붙여지지는 않았는지요..조금만 참고 먼저 들어 주면 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먼저 화부터 낸다. 남들은 이미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있다. 혼자 독백하며 온갖 주워 담지 못할 말들을 마구 쏟아 부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누구나 죄가 죄인보다 앞서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툭하면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 돌부터 먼저 든다. 돌을 든 채 남을 비판 평가해 버린다.

예수님처럼 대화를 시작해요.

수치와 모멸감에 지쳐 있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없었던 여인이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 앞에 여인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은 너무나 짠 합니다 .

여인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뭘 느꼈을까요?이 사람이 날 존중해 주는 구나 .

예수님은 죄는 미워 하십니다. 하지만 죄인을 향한 마음은 너무나 부드럽기만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모든 게 바꿔 질 수는 없다. 여인은 죄사함받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과감하게 불편함을 받아 들인다.

예수님의 대화는 결코 독백이 아니라 대화였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경고 하지 않으신다. 혼자 일인 다역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처럼 온유하셨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묵과 하시지 않으셨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격려로 그녀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세상의 떡으로 기준 삼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시선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지금 살아야 한다.

요즘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메타는 초월이란 뜻이고, 버스는 세계(유니버설)란 의미로 즉 초월 세계라는 의미다. 메타 버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순간성이다. 순간을 놓치면 지금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리기 쉽다. 순간성을 맛보는 맛.. 세상의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그 순간에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맛..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맛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 순간에 얻는 기쁨, 예수의 삶을 맛보는 참 맛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때다.

이것이 오늘 대화는 끊어 지고 독백으로 사는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다.

지금 나의 삶의 처지가 어떠한가?

주님은 한 여인을 버젓이 세워 놓고 독백하는 바리새인들은 향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주님은 오늘도 부단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내면의 바리새인/서기관을 자각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 이중적이고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독백에 머물 뿐이지 진정한 대화를 만들어 갈 수는 없다.

누군가의 대화에서 내 말을 줄여야 할때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올바른 말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 영감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 모습 속에서 간음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다면 이들을 향해 주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앞에 새로운 삶의 첫걸음을 내딛자.

너무나 익숙한 독백을 멀리하고 대화를 시작하라.

엡 4:29을 보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람을 앞에두고 혼자 화내고 열내고 분노하고 열받아 했던 모습들..독백의 돌을 내려 놓으라

독백은 상대방을 향해 더러운 말만 무성하게 할 겁니다. 더러운 말로 인해 상대방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더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대화는 덕을 세우는 말을 할 것입니다. 경청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해로 인한 끄덕임과 안전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독백으로 살지 않으시고 대화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깐부로 사셨다.

예수님의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대화로 친구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깐부다.

오늘 우리도 내 안에 독백은 사라지고 대화로 어떤 사람일지라도 품고 안을 수 있는 깐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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