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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2 (금) [하루 한 장]“나는 양의 문이라” (요10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유명한 본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분위기가
그리 부드럽거나 온화하지 않고
도리어 매우 분노에 찬 거친
외침과 호통이 가득합니다
9장에서 예수님이 보게 하신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를
바리새인들이 출교시키자
이를 보고 분노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면서 외친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자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목자이시자
양을 지키고 다른 이를 막으려
양의 우리 앞에 직접 누우신
대체불가능한 양의 문이십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누구든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들읍시다
예수님만 따라가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만 높이며 살아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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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Source: www.sooyoungr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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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목) “요한복음 10:1-21” / 작성: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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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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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0 장 설교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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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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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목) “요한복음 10:1-21” / 작성: 김광욱
본문 요한복음 10:1-21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공생애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 표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표적을 읽고 듣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믿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표적만을 보고 믿으라는 취지로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함으로 표적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표적만을 바라는 신앙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7대 표적’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있다면 ‘예수님의 7대 선언’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7대 선언’ 중 셋째와 넷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7대 선언’의 특징은 ‘나는 무엇이다’는 형식의 선언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7대 표적 중 여섯째,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치유하신 표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표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표적을 행하겠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한 일로 인해 화가 치민 상태였으며 그 맹인과 그 사람의 부모를 소환해서 심문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아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보시며 그들을 ‘영적 맹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맹인 치유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나는 무엇이다’의 형식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 맹인인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1-6절)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 원문는 ‘아멘 아멘 레고’입니다. ‘아멘’은 ‘의지하다’ ‘믿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아만’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진실로’, ‘참으로’, ‘온전하게’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기도나 찬송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을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양과 도둑의 차이입니다. 양우리(sheepfold) 안으로 들어갈 때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이고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입니다.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문지기가 우리(fold)의 문을 열 때는 양들이 주로 먹이활동을 할 때입니다. 밤 동안 우리(fold) 안에서 잠을 잤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fold) 밖으로 나갑니다. 목자들은 양의 이름을 불러 밖으로 이끕니다. 요즘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축에 꼬리표를 붙이지만, 고대사회에서 목자는 양과 함께 수십년 내지 평생을 지내면서 모든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모든 양들을 구별해 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목자입니다. 목자만 그렇지 않습니다. 양도 자신을 기르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장에 가서 소나 양 근처에 접근하려고 하면 가축들은 낯선 사람을 피하며 경계합니다. 가축들도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별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양과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하였기에 양이 목자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어도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우리’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맹인이었던 사람들의 영적 무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7-10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 한번더 ‘아멘 아멘 레고’라고 하시며 7대 선언 중 셋째,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양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은 자신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자는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천국의 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므로 양들이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양들에게 온 목적은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며 도둑질하고 죽이려는 것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배제한 형식적인 율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쳤기에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양 도둑과 반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양이 양우리로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또한 목자를 따라 ‘우리(fold)’ 밖으로 나가 꼴을 먹을 때 풍족함을 누립니다. 우리 역시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 풍족한 삶을 살아가며 구원을 받습니다. 다음은 7대 선언 중 넷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18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의 문과 다른 표현이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천국 문이신 예수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단순히 착하고 성품이 좋은 목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아무리 양을 잘 기르는 목자라고 할지라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예수님께서 양이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버리거니와’의 원문은 능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가 아닌 사람은 어떻습니까?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은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을 뜻합니다. 삯꾼이 양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이유는 목자의 마음을 품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가 양을 잡아 먹으러 오면 쫓아내지 않고 도망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합니다. 이리가 양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변만 생각하고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삯꾼이 도망가는 이유는 양을 돌볼 마음이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삯꾼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면 삯꾼입니다. 자기희생 없이 오직 일반 봉급자들처럼 일한다면 삯꾼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재차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의 특징은 양을 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양도 선한 목자를 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양인지 염소인지 또는 이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아는 사람은 양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양이 아닌 염소나 늑대입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율법에 조예가 있는 바리새인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임을 알고 믿는 사람이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시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양입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이 머리에 기억된 사람이 양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양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서로 앎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듯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성도가 서로 안다는 것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데 어찌 서로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 중에 우리(fold)에 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양들이란 이방인들 중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양들은 기존 우리(fold)에 있던 양들과 한 무리가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지역과 인종과 시대와 상관없이 한 공동체가 됩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데 그 이유가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일을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시 얻는 것은 목숨을 다시 얻는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활을 뜻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의 권세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그리고 그 목숨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양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십니다. 이 땅에 양으로서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살려주십니다.
분쟁이 일어나니(19-21절)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듣던 사람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분쟁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예수님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미쳤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합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때를 따라 꼴을 먹으며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물질적 풍족함이 아니더라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의 풍족함을 누립니다. 오늘 하루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꼴을 먹으며 평안의 풍족함을 누리며 고난 중에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양을 도둑질하고 죽이려는 이리가 있는 시대, 이리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이 있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양의 문’과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기억함으로 위로를 받게 하시옵소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 꼴을 먹으며 보호와 풍족함을 누리는 양처럼 저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 말씀의 꼴을 먹으며 주님의 보호와 풍족함을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목자와 달리 도둑과 강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양의 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4. 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하면 잊지 않을 수 있습니까?
5.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유대인 중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성: 김광욱)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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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매일성경의 묵상 본문에서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양의 생명은 목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매일성경을 큐티하면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의 관계를 생각하였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새벽예배 설교로 정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설교 전 찬송
새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 새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내 말만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내 말만 들으면 돼’라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다보면 실패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기 말을 따르라고 하는 사람 역시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것 중에 ‘비트코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상의 화폐인데 이 코인에 투자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코인에 투자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투자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듣고 투자를 하지만, 실제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말만을 들으면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사람은 성공이나 인생에 대해서 일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와 양
“양”이라는 동물도 제대로된 목자가 없으면 살아남는 일을 실패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성경은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음성만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만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생명과 풍성한 음식인 꼴은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양을 모르지만 목자는 압니다
왜 양의 생명과 꼴은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까? 방향 감각이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양은 어디에 그늘이 있고 물이 있으며 푸른 초장이 있는지 양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목자는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며 쉴만한 물가가 어디 있는지 푸른 초장이 어디에 펼쳐져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양은 모르고 목자는 알고 있기 때문에, 양의 생명은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9절의 말씀과 같이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함께 1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23편에서는 하나님이 선한 목자라고 다윗이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주시는 분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연결됩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고 죽기 위하여 이 땅에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은, 양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2.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목자가 없는 양은 고생하고 기진하게 됩니다. ‘고생한다'(σκύλλω, 스퀼로)는 것은 고통 가운데 있다는 뜻이며 ‘기진하다'(ῥίπτω, 립토)는 말은 버려진 상태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고통 가운데 있고 버려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양들에게는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목자는 오직 예수님
그러니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목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 외에 스스로 목자라고 말하는 자는 모두 삯꾼이요 절도요 강도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가며 양들에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오늘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함께 할 기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나라를 안정시켜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소서. 복음 전해야 할 그 사람이 생각나게 하소서.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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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 (요한복음 10장 1-10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http://thececc.com/wp-content/uploads/2020/03/20200327.mp3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중요합니다만, 이 중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시며 “진실로 진실로”라는 강조 어구를 사용하신 경우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2절을 보면 바로 이 “진실로 진실로”가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내용이 있길래 예수님께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걸까요?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말씀을 보니, ‘양의 문’ 비유가 나옵니다. 양의 문이 참된 양의 목자와 양을 훔치러 온 도둑, 강도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내용 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는 양의 목자 입니다. 그러나 양의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다 도둑이고 강도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양의 문을 통해서 도대체 어디로 넘어간다는 말일까요? 성경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 합니다. 따라서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도둑’과 ‘강도’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와 같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모세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한 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가로 막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이 바로 양을 훔쳐가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또한 양의 문으로 들어간 자를 가리켜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양의 목자’는 분명 예수님을 의미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양의 문을 통해 지나가는 목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 것을 볼 때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도 ‘양의 목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지금도 세상에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참 된 양의 목자들이 있는가 하면,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양들을 유혹하는 도둑, 강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3절을 봅시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 였습니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교사들과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양으로 상징되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5절 말씀을 봅시다.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불러 내시고, 그 양들보다 앞서 가십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양들은 목자가 아닌 타인이 부르는 경우에는 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지도 않고 도망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이죠. 예수님 시대에 당국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 비난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출교 시키겠다는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는 양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도둑과 강도들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참된 주님의 양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7절을 보면 또 다시 ‘진실로 진실로’가 등장합니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양의 문이심을 다시 한 번 강조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문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 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전에도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해 예수님은 8절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칭 메시아라 한 자들이 도둑이요 강도들이라 말씀하시며 실제로 하나님께 속한 양들이 그들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 역시 전 세계 수많은 이단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자칭 메시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신천지 역시 그 중 하나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들도 결국 영혼들을 바르지 못한 길로 유혹하는 도둑과 강도들인 셈 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단순하면서 동시에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9-10절 입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양은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질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꼴을 먹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양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도둑과 강도들은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뿐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이며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양 떼를 위탁 받은 제자들 입니다. 오직 참 된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생명을 얻되 풍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그들 역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16절 말씀 묵상 [유재도 목사]
제목 :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10:1~16
오래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목자들이 양들을 인도하며 가는 것을 인상깊게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땅에서, 신약성경의 말씀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그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양들에게는 중요한 특성이 6가지가 있습니다.
1. 양은 매우 약한 동물이며 비 공격적입니다. 자기 방어의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목자를 통해서 맹수들의 습격, 강도들의 습격, 지형적 위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2. 끊임없는 관심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거칠고, 풀이 많지 않고, 낭떠러지와 사막이 많기 때문입니다.
3. 각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갑니다.
4. 양은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르고, 위험이 닥치면 잘 놀라고, 흩어집니다.
5. 양은 앞을 멀리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좋은 풀, 마실 물, 평안히 안전하게 쉴 곳을 찾지 못합니다.
6. 양은 서로가 서로를 쫓아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양들은 앞서가면서 인도할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양과 같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다 양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0장은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11절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둘째,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그의 음성을 들으라고 합니다.
3절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셋째,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10절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날마다 읽으면서 예수님의 영원한 말씀을 들으며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매일 매순간 살아갔던 모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책 속에서 그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과 세계의 교회 역사 속에서도 과거에 강한 믿음으로 매일 매순간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도 과거 역사를 잘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책과 인터넷과 신문과 신앙잡지를 통해서 만납니다.
우리는 모두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으로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이 됩시다.
매일말씀묵상. 3월 20일. 요한복음 10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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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양과 목자는 서로를 안다.
1.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 양의 우리에 들어가되 ,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모든 자는 모두 절도요 강도일 뿐입니다 (1). 절도와 강도가 하는 일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10). 오직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목자입니다 (2).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7,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양의 우리(교회)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2. 신구약 성경의 역사와 2000년의 교회 역사에 이런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분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참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3~5,8). 진짜 양들은 도둑과 강도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8).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 누구를 따르는가는 그가 참된 양인지를 드러내 주는 표지입니다 . 교회라고 모두 참된 교회가 아니고 , 목사라고 모두 참된 목사가 아닙니다 . 분별하십시오 .
3. 주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11,14). 선한 목자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며 (10), 그 일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립니다 (11,15). 그러나 삯군은 돈을 위해 일하고,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12). 양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3).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압니다(14). 이 앎은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이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를 아시는 것과 같은 앎입니다(15).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아직 양의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자기 양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도 인도하실 것입니다(16). 이것은 선교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양을 구원하시는 일은 당신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으시는 일이며, 철저하게 주님의 주권적 권세에 속한 문제입니다(17~18). 모든 목사와 장로는 선하신 목자 ,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선한 목자인가 , 아니면 삯군인가 , 절도며 강도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양의 몫입니다 . 참된 주님의 양은 그것을 분별합니다 .
4. 수전절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42). 수전절 ( 하누카 ) 은 주전 165 년 , 유다 마카비우스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탈환하여 ,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22). 일종의 독립기념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6) 이 말씀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알려달라”고 주님께 재촉하듯 물었습니다(24). 주님은 이미 말씀과 행함으로 그것을 증거하셨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이라고 그들의 불신을 지적하셨습니다(25). 불신의 이유는 하나,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6~27).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당신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양 한 마리도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28). 양들을 주님께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29).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30).
5. 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주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 이 말은 유대인의 마음을 자극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긴장이 조성됩니다 (31). 신성모독이라고 판단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인간 지도자도 하나님께서는 신이라고 하셨거늘(시 82:6 참조: 재판장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 지도자가 아닌 주님으로써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책잡느냐고 도리어 책망하셨습니다(34~36). 그들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직하고 깨끗한 눈으로 볼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주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주님이 계심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38).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정직하게 볼 수만 있다면(이 깨닫는 마음이 성령님의 은혜다), 그들은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6. 주님께서는 그들이 돌로 치려했지만 영적인 권위로 그들을 피하여 떠나가셨습니다 (39). 그리고 전에 요한이 세례 주던 곳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참되다고 판단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써 자신들이 주님의 양임을 스스로 증거한 것입니다(42).
7. 신앙은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14). 이 믿음으로써 내가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양이 아니면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목자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 성경을 배우고 , 교회 행사에 참여하고 , 종교적 행위들을 하지만 , 정작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습니다 . 교회만 다닐 뿐이고 , 교회라는 단체나 목사에게 충성하기만 할 뿐이라면 , 그 신앙은 거짓된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 종교적인 행위들을 하면 할수록 ,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발견되고 , 그 은혜 앞에 납작 엎드려지는 겸손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 입에서 나오는 말로 판단하지 말고 , 여러분의 내면 깊숙한 곳을 살피고 점검하십시오 .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람과 단체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주님께 충성하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주님의 양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또한 목자 되신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양의 마음과 겸손함을 주옵소서. 더 나아가 주님께서 세우신 목자를 말씀으로 분별하고,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을 따라가는 저희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0장 1-21절 선한목자인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1-21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을 말할 때 구약성경은 거짓목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먹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불렸습니다. 양으로부터 나오는 부산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진정으로 양의 생명이나 행복은 생각하지 않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거짓 목자’, ‘삯꾼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돌보아야 할 백성들의 삶과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위했고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얻을 유익과 존경만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에 대해 절도며 강도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여전히 성경시대의 모습으로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통상 베두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발달된 도시 생활을 따르기보다는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목축과 그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밤이 되면 동굴이나 임시로 만든 울타리 안으로 양들을 몰아넣습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해치는 짐승들이 많고 밤 기온이 차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목자는 우리의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양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해로운 짐승들이 양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을 목자가 지키기에 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양을 도적질해 가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양의 우리에 넘어 들어가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시 종교지도라고 하는 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의 행태가 진정으로 양떼를 위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들어가는 자들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대의 사람인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을 지키고 있는 목자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간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우리에서 양을 불러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양은 시력도 나쁘고, 방어력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고, 잘 속고, 잘 넘어지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특별히 시력이 아주 나쁜데 양의 시력을 인간의 시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양은 마이너스 10 디옵터 정도로 안경을 써야할 만큼 시력이 나쁘다고 합니다. 1-2m 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력이 약한 반면 탁월하게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청력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발달되었습니다. 양들이 무리지어 이동할 때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내고 가장 우두머리 양의 목에 종을 달아 놓는데 이는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렇게 탁월한 청력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는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하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서 다 내어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놓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크발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밖으로”라는 “에크”와 “던지다”라는 뜻의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에크발로”는 직역하면 “밖으로 던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쫓아내다, 몰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이미 9장34절에서 한번 쓰였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내쫓김을 당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선한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강제로 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이 게으르고 혼자서는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기에 목자는 종종 양에게 강제력을 동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강권적인 역사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 이끄심이 때로는 고달프고 힘들어도 그 목적이 양인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실 이 강제적 이끄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을 수도 없었던 우리들의 영적 죽음과 무능력으로 인해 주께서 세상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강제로 내놓음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밖으로 불러냄을 입은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그리니까 세상으로부터 에크발로, 쫓겨난 사람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 교회인 것입니다.
양의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놀라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도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양들의 예민한 청각과 두려움 많은 특징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자신을 해하려는 줄 알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을 대표로한 종교지도자들의 음성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므로 양들이 흩어졌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온 백성들의 반응은 목자의 음성이었기에 그것을 듣고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엇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주님은 당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양들이 우리에서 나올 때나 들어갈 때 목자는 양 우리의 문을 지켰습니다. 나올 때는 이름을 하나씩 불렀고 들어갈 때는 문에 서서 밖에서 하루 종일 풀을 뜯었던 양의 피부와 건강 상태를 살피며 들여보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양의 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보다 누군가 먼저 와서 양들을 들여보내려고 해도 양들은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를 양들이 알뿐 아니라 그에게로 나아가는 양들은 위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절도며 강도라고 한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절도며 강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면서 주님의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의 우리인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이심은 7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셨습니다. 9절에도 “내가 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 하실 때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문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속한 양들의 유일한 문이십니다. 양이 생명을 얻고 풍성함을 누리는 길은 유일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한다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지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드나드는 양만이 구원의 꼴을 얻고 풍성하게 얻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9절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1-12절에도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25-29절에도 명확히 밝히십니다. 자신의 음성을 듣는 자신의 양에게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담 안에 태어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영혼이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없는 인간들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말씀하신 대로 영적으로 죽은 시체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은 다 태어나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죽어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위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이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은 구원 받은 백성, 즉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풍성함”은 이 땅의 것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일류대학에 가는 그런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풍성함은 앞에서 말한 영적인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형편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이건 실패의 순간이건 간에 그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한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한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인 이유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 대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는 표현을 15절에서도, 17절에서도, 18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이 일을 이렇게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실 정도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양떼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면서 그렇지 못한 당시의 지도자들을 비유하여 삯꾼 목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2절과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목자라고 하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삯꾼 목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삯꾼목자라고 한 것은 양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생명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삯꾼 목자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양들의 목숨을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양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 양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선하신 목자인지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15장은 이러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버렸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양을 맡아 키울 때 양의 주인과 양의 20%는 잃어버리거나 짐승에게 잡혀 먹혀도 손해를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백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그 양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쓴 것입니다.
반면 악한 목자인 삯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가랴는 스가랴서 11장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세 명의 목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판자, 양의 산자, 양을 맡아 돌보는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양의 목숨과 행복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오직 한 가지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양을 판자도, 산자도, 그것은 맡아 키우는 자도 오직 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삯꾼이라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했지만 오직 방법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 밖에는 없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 안에 있는 생명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 또 한 가지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 구원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주님은 계속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영혼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쉼 없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죽으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 죽음이 가치 있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주님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더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버리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각각 부르셔서 생명을 얻게 하셨고 풍성히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선하신 목자의 인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019.10.13. 요한복음 10장 7-21절 “나는 선한 목자라(2)”
날짜 : 2019년 10월 13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0장 7-21절
점검한 번 해 볼까요? 여러분! 어떻게, 지난 한 주간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사셨나요?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잘 살다 오셨지요?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늘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은 양들보다 나은 것이 없어요. 우리는 눈도 어둡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어 어디로 갈 줄도 모릅니다. 게다가 고집도 엄청나게 세지요. 약하기는 얼마나 약하고 놀라기는 또 얼마나 잘 놀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각과 고집대로 살면 큰 일 납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 버리고 위험해 집니다. 방향없는 인생이 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며 참된 평안을 모르는 채로 살게 됩니다. 제 멋대로 광야로 나간 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는 영혼의 귀를 주셨습니다. 이 귀가 우리가 가진 전부입니다. 우리가 믿을 거라곤 이 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이 귀를 예민하게 갈고 닦아야 하며, 겸손하게 잘 지켜야 합니다. 목자가 우리를 부를 때, 그것이 목자의 음성인 줄 알아듣고 언제든지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정직하고 겸손하게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진리’를 잘 담아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 음성을 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하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진리하고만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뒤를 따르는 양들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9장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생소할 수 있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매일 아침 거의 모든 마을에서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비유가 옆집 사는 김씨 아저씨가 어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는 이야기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이 이 비유를 알아듣는데 실패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목자가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눈만 껌뻑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에게 속한 양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게 되지요. 그것이 예수님께 속한 양들에게만 있는 복된 특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알아듣기 쉽게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장 간절한 바램이었으니까요.
오늘 본문을 살피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분명히 해 놓아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다”, “내가 선한 목자다” 그렇게 두 번씩 힘주어서 말씀하시는데요.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양의 문이 있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다, 이 세상에 선한 목자들이 많이 있지만 나도 선한 목자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양의 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다른 양의 문은 없습니까? 다른 선한 목자는 없나요?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시고, 예수님만이 하나 밖에 없는 선한 목자이신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 믿고 따라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시고,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라는 것을 믿으며 그 분의 양으로만 살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너무 독선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강렬합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둑과 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닌 사람들은 기껏해야 자기 이익을 위해 양 떼를 돌보는 삯군 목동에 불과하다고 하셨어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거짓 메시야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나 아니면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비슷한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아니면 안되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 하나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유일한 양의 문이시며, 또 하나 밖에 없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가, 그래서, 그 분을 양의 문과 목자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특별한 복을 헤아려 보는 귀한 기회를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뜻을 살려서 다시 읽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양의 문이다’라는 말씀이 될 것 같은데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 10장 첫머리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평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양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절부터 10절까지에 나오는 양의 문의 비유는 산간지역에서 홀로 양을 기르며 살아가는 목자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간지역에 있는 양의 우리는 평지의 마을에 있는 양의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일단 그 우리는 목자 혼자서 자기 양을 기르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에 있는 큰 양우리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의 재료는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돌담으로 빙 둘러친 다음 한 곳만 열어놓은 작은 울타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는 목자 혼자서 양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따로 문지기가 고용되지 않습니다. 밤에 양을 지키는 일도 목자 혼자서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산간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그렇게 돌담의 열린 곳에 목자가 자리를 잡고 누워서 도둑이나 짐승이 양을 헤치지 못하게 양떼를 지키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양의 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이러한 목자의 역할 때문에 생겨난 목자의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나는 양의 문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하나 밖에 없는 양의 문이다”라는 뜻이라고 풀어서 설명해 드렸지만, 이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양의 우리가 하나인데 양의 문이 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 양의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목자가 바로 유일한 양의 문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다른 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한 양의 문이시고, 그 외에 다른 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나를 통하지 않고는 그런 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우리의 입구에서 양들을 불러 냅니다. 그러면 양들은 우리의 입구로 오지요. 그리고는 밤새 목자가 누워서 양들을 지켰던 그 곳을 지나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양의 문’인 목자는 그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체크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이끌어 하루 종일 꼴을 먹인 다음, 저녁에 돌아올 때는 또 다시 입구를 지나 우리로 들어가는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체크하지요. 그러니 어떻습니까? 그 양의 문을 통해서 드나드는 양들만 안전합니다. 그 양의 문을 통해 드나드는 양들만 좋은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양이 양의 문이 아니라 돌담을 뛰어 넘어 가거나 벽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나가 버리면 그 양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거나 먹이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복음서에서 ‘들어간다’는 말은 거의 항상 ‘하나님 나라’와 짝지어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곧 나 외에는 구원얻을 길이 없고, 아버지께로 갈 방법이 없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 외에는 그런 은혜를 얻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그 양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시니까 양들이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고 나가고 하면서 꼴을 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말씀 속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아주 특별한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수도 없이, 그리고 분명하게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구약성경의 두 곳을 읽어드릴테니까 화면을 보시면서 한 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신명기 28절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다음은 에스겔 34장 1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그 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된 약속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 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당신의 양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큰 복이 없고, 예수님이 주시는 복보다 더 좋은 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소유하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크고 완전한 복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의 양떼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최고의 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양이 되어 그 분의 돌보심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는 늘 이런 복과 은혜 아래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한 양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라는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내가 선한 목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에게 두 가지를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첫째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생명보다 더 풍성한 생명입니다. 앞에서 첫번째 말씀을 다루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해 주시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그런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의 우리에 들지 않은 바깥에 있는 양들은 다 ‘죽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죄 때문에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버렸으니까요. 그 양들은 이미 뿌리가 뽑힌 나무이고, 줄기가 잘려나간 초목과 같습니다. 그래서, 복도 좋고 은혜도 좋지만 그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그 좋은 복도 은혜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아무도 손해를 본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가 유익을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우리 하나님이 정직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정직하신 성품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일도 똑같습니다. 죽은 우리, 생명이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살아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 생명은 그냥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생명에 국한됩니다. 그 어떤 고귀하고 숭고한 죽음도 끊어져 있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켜 줄 수 없고, 그렇게 우리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목자들 중에는 양들이 위험을 당하면 짐승이나 도둑들과 싸우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하지만,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는 유사시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영원 전에 하늘에서 정해놓은 기정사실이었지요. 예수님은 다른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데,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게 되셨던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가 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양떼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줄 수도 없지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생명이 양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지는 못하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셔서 그 생명이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해 주십니다. 그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하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해 주시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당신의 귀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이런 목자가 또 있을까요? 자기 양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는 선한 목자, 이렇게 자기 양떼를 깊이 사랑하는 목자가 또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목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목자를 우리의 목자로 삼아도 됩니다. 그 목자를 따라가도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밖에는 그런 목자가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고서 그 분만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안에서만 영원히 안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안에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만이 양떼들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도 그 분을 압니다. 수많은 음성과 소음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구별하고 그 음성에만 순종할 정도로 그만큼 예수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도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기르시는 양들이니까요.
세상에는 자신이 선한 목자인 척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만 믿으십시오. 예수님만 따르시고요. 그 분의 양이 되어 그 분의 음성만 듣고 늘 그 분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양들이 살고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복된 방식이니까요. 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양의 문이 되어 주시는 그 분을 통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주님 기르시는 양으로 살아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딱 한 분 밖에 없는 선한 목자, 우리 예수님의 양떼가 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이 귀한 은혜 받았으니 늘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드나 들며 꼴을 얻게 하소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선한 목자의 그늘 아래에만 머물며 날마다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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