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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장 43절-51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9/17/2020
요한복음1장 43절-51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9/17/2020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 속을 알기 …
Source: ebctl.org
Date Published: 3/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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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3절-51절 큐티 :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요한복음 1장 47절부터 51절 부분에서는 나다나엘과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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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3-51절/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 다음블로그
신자에게 있어 진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를 찾으시고, 진실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사람이 모든 면에 양심을 쓰고 진실해야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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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3~51절 설교(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 With us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뒤덮을 때까지 그 은밀한 곳에 머물라. 당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성에 귀를 …
Source: sss333.tistory.com
Date Published: 4/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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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의 변화(찬461장)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나다나엘이 만났던 예수님을 우리도 만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생활 자세가 바뀌고, 주님의 온전한 도구로 …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5/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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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보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장 43절 51절
요한복음 1장 43절 51절 좋게 보시는 예수님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
Source: jesuskorea.kr
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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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한복음 1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그도 43절 이튿날로 보아 이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주위로부터 들고, 예수께서 자신도 불러주기를 …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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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7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장 43 …
그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셨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44절에 보면 이 빌립이란 사람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
Source: cpcgl.org
Date Published: 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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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
요한복음 · 1 태초에말씀이 계시니라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6/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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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제자 나다나엘 (요한복음 1장 43-51절)
정직한 제자 나다나엘 (요한복음 1장 43-51절). 세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
Source: lastingforever.tistory.com
Date Published: 7/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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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 장 43 절
- Author: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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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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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43절-51절 큐티 :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요한복음 1장 43절-51절 큐티 본문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빌립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나를 따르라’고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43절)
빌립은 어제 본문에서 예수를 따르게 된 안드레, 베드로와 같은 벳새다라는 동네의 사람이었다.
빌립은 이렇게 예수를 따르기로 하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 전까지 수많은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를 자신이 만났다고 전한다.(45절)
나다나엘은 처음엔 이 말을 듣고 믿지 않는다 (46절)
요한복음 1장 47절부터 51절 부분에서는 나다나엘과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신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관련되어 있다.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속임수를 써서 자기 것을 더 부풀리는 행동을 했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께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시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보시면서도 이렇게 간사한 것이 없는 마음이 순수한 딸이라고 말씀해주셨으면 너무너무 좋겠다. ^^
48절에서 나다나엘은 “어떻게 저를 아세요?”하고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이 대답하길,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시는데,
여기서 ‘무화과 나무 아래’는 주로 랍비들이 율법을 연구하는 자리였기에, 여기서는 말씀을 묵상하고 있을 때를 의미하는 관용구일 수 있다.(주석 참조한 내용)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평소에 묵상할 때, 예수께서 보고 계셨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니면 정말 말그대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서있을때 너를 봤다, 이런 뜻이었을까?
그건 좀 말이 안된다. 그냥 사람을 본다고 해서 그 내면을 볼 수는 없으니까…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50절)
51절은 마지막 날의 모습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 위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
나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에서 정말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기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간사한 것이 없는 마음이 순수한 자녀로 살도록 인도해주세요.
마지막 날, 저도 같이 예수님과 천사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주변 사람들도 다 같이요.
영적 분별력
본문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내용입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라고도 부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43절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이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자 빌립은 두말없이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즉각적인 결단과 순종이 참 놀랍습니다. 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1. 빌립의 전도와 나다나엘의 반응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이분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입니다.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면서 갈릴리를 무시했습니다. 나사렛은 그 갈릴리 중에서도 작은 촌 동네입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왕궁에 나실 것이며 훌륭한 가문을 통해서 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 얽매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편견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만나보지도 않고,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 중에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면서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비판을 합니다.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정말 용감하게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진짜 아는 사람들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정말 안다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 용감하게 비판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다시 말했습니다. “와서 보라(46절)” 예수님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예수님을 직접보고, 직접 말씀을 들어보고, 사실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만나보면 알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 이것은 어느 시대 누구나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도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생길 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의심하면서도 친구를 따라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2. 예수님이 나다나엘에 대해 한 말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다나엘을 칭찬하고 그의 좋은 점을 말해주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에게 잘못이 없었겠습니까? 실수가 없었겠습니까? 방금도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덮어버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다나엘의 좋은 점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본받고 싶고, 닮고 싶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합시다. 장점을 말해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줍시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칭찬합시다.
또 하나 살필 것은 예수님이 나다나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을 모르고 있었는데 주님은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다나엘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자세히 아십니다. 47절에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참 신자다’는 뜻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는 속에 거짓과 외식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간교하게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기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찬사입니다. 신자에게 있어 진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를 찾으시고, 진실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사람이 모든 면에 양심을 쓰고 진실해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상대하는 신앙생활은 더욱 진실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외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벌 받을 일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7번이나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반대로 시편 51:6에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성도의 생명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일을 했다면 찾아서 회개하고 양심을 똑바로 쓰며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도 진실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겉모습이 아닌 “그 속”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겉만 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외모에 치중하고 간판만 좋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속을 보시고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임을 아시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속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3-4에 보면 겉모습만 단장하면서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만 꾸미려고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람(속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정하고 알아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필요도 없고 또 사람들이 많이 알아준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내 속을 보시고 나를 인정해주신다면 그것보다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나다나엘의 속을 다 보시고 아셨습니다.
3. 나다나엘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48절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떻게 아시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고 이스라엘 사람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조용한 묵상의 시간을 가지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며, 오실 메시야를 묵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주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은 내가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다. 우리가 어디서든지 기도하면 주님은 아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마태복음 6:4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나다나엘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49절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믿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자기의 은밀한 기도 생활을 아시고, 자기의 영적 상태의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본 것은 은밀한 것이요,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더 큰 일은 5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잘 때 하늘이 열리고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은 사닥다리가 섰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다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것이 열리고 누구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앞으로 될 일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은 미리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될 것들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가 나갈 길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척하는 것은 교만한 일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시편 139편에 보면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나의 모든 행위도 아십니다. 혀의 말도 다 아십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가 겉으로는 주님께 입을 맞추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팔고 배반한 것을 아셨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땅 값을 속이고 거짓말 한 것도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시고 누가 정말 바른 기도를 했는지 평가하셨으며 누가복음 21장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연보를 보시고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했는지 평가하셨습니다. 과시하며 드린 헌금과 진실한 헌금을 구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밀려와서 접촉했는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매 주일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오지만, 주님은 누가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지는지 바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고 계십니다. 몸과 마음과 힘을 바쳐 예배하는지 주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사람에게는 적당하게 위장하고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다니엘처럼 속에 간사한 것이 없어야 참 이스라엘 사람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을 잘 가꾸고 만들어서 주님의 인정을 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전 탄방교회 박석중목사
요한복음 1장 43~51절 설교(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요한복음 1장 43절~51절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데 1장 46절에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듣고‘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몇 마디 나누고 나서 49절에서는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고 따지던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사렛 사람 예수를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단 몇 마디 말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서 나다나엘은 이렇듯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중심에는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 예수님이 알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빌립이 부르기도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이 세 가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나다나엘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선입견이 바뀌어지고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①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 –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오늘 본문 47절과 51절 말씀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누가 생각나십니까?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야곱의 이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얻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야곱과 같은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의지하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천성이 그 이름처럼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간사하게 누군가를 속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외삼촌 라반을 속여서 자신의 재산을 늘렸습니다. 천성적으로 사기꾼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 만나고 간사한 자에서 진실한 사람인 이스라엘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나다나엘은 참으로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번도 본 적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 마음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
우리를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까요 ? 아니면 야곱처럼 간사한 자라고 할까요 ?
인간은 누구나 간사한 데가 있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간사한데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평생 한번도 거짓말 해본적이 없다는 분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했던 가장 큰 방침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처음에는 청결을 강조하고,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신용을 지킬 것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서양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한국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3-5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보고 기뻐하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그 이유는 5절에 나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짓없이 믿음 생활하는 디모데를 보면 사도 바울이 기쁘기 때문에 디모데를 더 보고 디모데를 생각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거짓 없는 믿음이 있어야 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참이스라엘 사람임을 우리 주님은 이미 알아보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마음도 감찰하시고, 우리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보십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주님 앞에 거짓없는 믿음으로 사십시다!
가끔 보면, 누가 보지 않더라도, 은밀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고, 선행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한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이익이 있더라도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의 자리를 빠지지 않고 사모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모를 아픔, 고민, 걱정 속에서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원래 그랬다면서 거짓을 밥먹듯이 하지만 나만은 정직하리라 하는 각오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게에 가서 만원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오천원이 아닌 오만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서 오천원을 잘못 거슬러줬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마도 땡잡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정직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입니다. 그러한 정직한 분들을 알아봐주시고, 인정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아무개야, 힘들지? 그래도 너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인정해 주십니다. 정직이라는 용기는 모든 사람들이 몰라도 우리 하나님만은 알아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뒤돌아서서 거짓말하는 이들이 되지 맙시다! 주여~ 주여~ 하면서 간사하게 살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처럼 진실한 자를 알아보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스라엘사람이라고 칭찬해주십니다. 이러한 진실한 자, 정직한 자, 우리 주님께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오늘 말씀 4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무엇 때문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 갔을까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더운 지방이라 방 안은 무척 덥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에는 흔히 무화과 나무 아래서 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조용히 묵상하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있는 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조용히 혼자서 하나님께 나가는 무화과 나무 아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나다나엘을 특별히 주목하셨습니다. 남몰래 시간을 내어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할 때,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특별히 그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는 그가 하나님을 특별히 찾고 있는 시간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인정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 아래입니다.
에이든 토저 목사님이 한 깊이 있는 말이 있습니다.
“단순과 고독을 기르자. 날마다 세상을 떠나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라 침실이라도 좋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뒤덮을 때까지 그 은밀한 곳에 머물라. 당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식별하라. 매순간 내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라.”
왜 우리가 새벽마다, 날마다 이 자리에 나와 우리의 내면 속에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성전이 무화과 나무 아래요 하나님 앞에 잠잠히 엎드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기도하는 자신을 너무도 분명하게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남몰래 홀로 거룩한 고독 속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에 특별히 우리를 주목해주십니다.
지금의 세상은 우리를 너무 분주하게 만듭니다. 현대인은 늘 소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동차소리, 음악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럴 때일수록 잠잠히 무화과 나무 아래로 달려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에 십분이라도 말씀 앞에 서십시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십시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대면할 때에 그의 옹졸한 성경지식이 깨어졌습니다. 그의 알고 있던 신앙경험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알았던 모든 관념과 고집과 인격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외쳤던 그 입술에서
나사렛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는 놀라운 고백이 터져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도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너야말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1장 50-5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종종 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찌어다!”
열두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맹인 바디매오에게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기적,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맨처음 1장에 나온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맨 마지막장인 21장에서 또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차려주신 조반을 먹는 그 자리에서 부활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더 큰 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은 작고 연약하고,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물으시는 그 물음 피스튜에이스 “네가 믿느냐?” 그 믿음에 내가 믿습니다 응답하는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진실한 사람, 참 이스라엘처럼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나다나엘처럼 무화과 나무 아래 자주 자주 가시기를 바랍니다.
단순과 고독을 기르시고,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큰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3-51,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의 변화(찬4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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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개역개정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3-51, 쉬운성경
43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심>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45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썼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찾았다. 나사렛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46 그러나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뭐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47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여기 참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8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50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해서 나를 믿느냐?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51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을 만나신 예수님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의 변화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기업 회장? 대통령? 자녀들이 다 잘 된 사람? 백수를 누린 사람? 여러분 마음 속에는 지금 누가 가장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1. 가장 복 받은 사람 – 대기업 부회장, 술 취한 아저씨
수영로교회 원로 목사이신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동네에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술을 좋아하면서도 교회는 빠지지 않았는데, 어느날에도 술을 마시고 예배에 왔었는데 옆에 있던 성도들이 술냄새 풍기면서 교회 나오면 안된다고 한마디씩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이 아저씨는 성도들이 모였을 때에는 교회에 못 나오고, 예배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간 이후에 몰래 교회에 와서 술냄새 풍기면서도 엎드렸다고 합니다.
어느날 중학생인 정필도 목사님이 예배 마치고 기도하고 제일 늦게 예배당을 나서려는데, 그 아저씨가 교회 구석에 몰래 숨어 있는 것을 보고 왜 예배 후에 오시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아저씨가, “내가 술은 마셨어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지” 대답하면서도 중학생에게 술냄새를 풍기며 교회에 숨어 들어온 것이 부끄러워 어쩔줄 몰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이 아저씨는 술을 끊고 매일 교회에 와서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장로로서 성실하게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이 아저씨는, 일평생 술에 쩔어 살다가 알콜 중독으로 건강이 상하여 죽거나, 혹은 한겨울에 술에 취해 얼어죽을 수도 있었지만, 예수 앞에 무릎 꿇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왔을 때, 그의 삶이 완전히 뒤바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뉴스에서는 한 대기업의 부회장이 재판 받는 모습들이 거의 매일 신문에 나옵니다. 부귀와 명예와 재산을 다 가진 사람이지만, 연일 재판을 위해 재판정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예수 믿고 인생이 변화한 사람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복을 받지 못했다면, 대기업을 가져 재산이 많아도, 높은 자리에 올라 대통령이 되어도, 자자손손이 다 잘 되어도, 100살을 살면서 아프지 않아도 복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과 그 마음이 구원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 속에서 죄에 억눌려 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예수를 믿고 인생이 변화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별 것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2. 메시야 운동과 나다나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땅에는 여러 메시야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유대인들을 로마인들에게서 구원하여 줄 위대한 지도자를 말합니다. 적들을 물리치고 유대인들을 세계 열방 중에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세워 줄 지도자를 메시야로 생각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 일로 예루살렘이 시끌시끌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중에는 복음 전하는 사도들을 없애려고 할 때,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 5:36-37, 개역개정)
‘드다’라는 사람, 갈릴리의 ‘유다’라는 사람들이 메시야 운동을 시작하여 유대인들을 구원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메시야라 불렀던 드다나 유다가 죽고 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다나엘도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 역시, 메시야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시큰둥 하게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 1:46, 개역개정)
나다나엘은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연구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가서 5:2에 의하면, 메시야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율법책에 의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니, 결코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조그마한 산촌 마을에 불과했으며, 갈릴리 지방은 이방인들이 사는 동네와 같이 부정한 곳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던 나다나엘이 볼 때에는, 이처럼 부정한 곳 출신인 예수가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친구 빌립의 말에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으로만 메시야를 알고, 율법만을 연구한 그에게 예수님은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
나다나엘을 찾아 오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무화과나무의 잎은 크고 넓기 때문에, 그 아래 그늘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랍비들은 그 그늘 아래에서 율법을 연구하거나 율법을 가르쳐 왔었습니다. 나다나엘 역시 율법을 사모하고 연구하던 사람이었기에 무화과나무 그들에 있었고, 그 장면을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율법의 지식과 소문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신지 몰랐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다나엘은 그 삶이 바뀌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보던 사람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역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후 나다나엘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 있었고, 초대 교회의 사도로서 인도와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밀라노의 두오모(Duomo) 성당에 있는 나다나엘(바돌로매) 조각상
그리고 복음을 전하던 그 곳에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그림은,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있는 자신의 살가죽을 둘러 맨 나다나엘 조각입니다. 끔찍해 보이지만,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모르는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통 가운데 순교를 하였지만, 예수님은 오늘 말씀 속에서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 50-51절처럼 말씀하십니다. 제가 5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개역개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장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닥다리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 그가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시민이 되는 그 복들을 나다나엘이 받았습니다.
4. 예수를 만날 때 삶이 바뀝니다.
한 산골 깊은 시골 마을에, 젊은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도하였습니다.
“할머니,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만나고 믿으면 구원을 받아요.”
이 말을 들은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준다고? 요즘 세상에 십원도 아니고 겨우 구원을 받아서 어디다 쓰겠누… 쯧쯧쯧. 예수 안 믿어”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부스러기로 떨어질 구원만을 바라고 있으면 어떻합니까? 예수를 믿고 삶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인생이 변하며, 세상의 종에서 천국의 하나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겨우 구원 밖에 안되는 이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 인정에 목을 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도들 가운데에도 세상이 힘들고 지쳐 희망이 없는 상황이 되면, 스스로 좋지 않은 생각, 좋지 않은 결정을 합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생을 포기해 버립니다.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만날 때, 우리의 부정적 생각, 우리의 힘든 인생, 우리의 피곤한 하루가 변화 합니다. 우리의 아픈 몸과 마음이 변화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그분께서 나를 바꿔 주십니다.
잠언 8:17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법을 알려 줍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개역개정)
이사야 선지자도 55:6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개역개정)
찾는다는 말은, 잠언에는 히브리어로 “솨하르”(שָׁחַר)로, 이사야서에서는 “다라쉬”(דָּרַשׁ)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솨하르’는, 열정을 다해 찾고 또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찾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부지런히 찾읍시다. 말씀 속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또 읽어가며 예수님을 찾아 봅시다. 간절히 열정적으로 찾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부정적 생각, 슬픈 생각, 외로운 생각을 기쁨과 감사, 평안이 넘치는 생각과 마음으로 바꿔 주십니다.
‘다라쉬’는 만난 후에 그 관계를 계속해서 조심히 지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떠나시지 않도록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을 전하는 말, 예수님처럼 발을 씻기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성화”가 됩니다.
저와 우리 모두가, 나다나엘이 만났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참으로 만납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가짐, 우리의 생활 태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뒤바뀌는 은혜를 함께 경험해 나갑시다. 그리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마음에 온전히 모시고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따라 살아나갑시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성령의 은혜가 우리 가정, 직장, 일터, 하빈 지역과 다사 지역과 대구에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나다나엘이 만났던 예수님을 우리도 만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생활 자세가 바뀌고, 주님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으며, 마침내 천국의 자녀로서 주님 주실 생명의 관을 쓰길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며 간절히 찾고 찾으니 우리를 만나 주옵소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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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7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장 43-51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http://thececc.com/wp-content/uploads/2020/02/20200207.mp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자인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빌립을 만나시는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3절은 “이튿날”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날 다음 날 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준 날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 날 입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셨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44절에 보면 이 빌립이란 사람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 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운데 놓고, 가버나움은 북서쪽에, 벳새다는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벳새다는 조그마한 어촌 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빌립 역시 안드레와 같이 본래 세례 요한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립은 갈릴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적으로 응답 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빌립 또한 안드레와 같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이 분이 메시아이심을 감지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새벽에 살펴 본 내용 혹시 기억 나십니까? 안드레가 예수님이 그토록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가장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도 이와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확신한 후 곧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성경이 빌립과 나다나엘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아 우리가 이 둘이 가족인지 가까운 친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형제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가까운 사이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성경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정확하게 계산했던 제자가 바로 빌립 입니다. 셈이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 ‘빌립’이 헬라어식 이름이란 면에서 보면 그는 헬라 문화에서 익숙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했을 때,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빌립은 유대 문화도 익숙하고 헬라 문화에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능통한 1.5세와 같은 사람이 빌립인 셈 입니다.
수에도 밝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빌립, 이처럼 평상시 매우 이성적인 사람인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무척이나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45절 말씀 입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 자네 내 말을 좀 들어보게. 내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분을 만났어.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야!” 45절에서 빌립이 말한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란 표현 보이십니까? 우리가 얼마전에 새벽예배 때 세레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신명기 18장 15절 말씀을 찾아 본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죽은 이후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해 일으키실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죠. 또 45절에 “예언자들도 기록했던 그 분”, 이 역시 구약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지금 ‘메시아’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셈 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6절 입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는 빌립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떨떠름 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미가서에는 분명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에 나사렛이란 동네는 이스라엘의 촌구석 입니다. 오늘날 느낌으로 말하면 서울의 달동네 판자촌인 셈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동네는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한 밤중 강도나 술에 취한 사람들 사이의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동네 입니다. 그러니 이 가난한 촌 동네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하니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말한 것이죠. “빌립, 나사렛이라고? 나사렛이라고? 그 동네에서 무슨 좋은 사람이 나오겠는가?” 이렇게 나다나엘이 말할 정도였으니, 나사렛은 정말 낙후한 지역임은 분명합니다.
자, 이에 대한 빌립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46절 말씀 한 번 다시 보십시오. 후반절에 보면 “와 보라” 영어로 Come and see 입니다. 이 표현 어디서 본 듯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 38-39절 말씀을 봅시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 요한이 예수님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39절에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와 보라” Come and see 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아마도 나머지 제자가 바로 안드레의 고향 친구이자 신앙의 열심이 있었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죠.
빌립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분이 메시아인 것을 확신했기에,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생각이 180도 변하리라 확신 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 이 때 저 멀리서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47절 입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우리가 나다나엘의 마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다나엘은 마음이 겸손하고, 진실하고, 말씀에 충실한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다나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속임수나 간계를 쓰지 않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평상시에도 메시아의 오심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 자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다나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도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당시 무화과나무는 무성하고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뜻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 때 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깊은 속을 알아 본 예수님께 나다나엘이 말했습니다. 49절 말씀 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 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으로 부름으로 그 분이 진정 메시아 되심을 고백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앞으로 더 큰 일 볼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50절 입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요한복음 2장부터 12장에이어지까지 계속되는 일곱 표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일곱 기적들 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심으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보이셨습니다.
51절을 봅시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8장을 보면 아버지 집을 떠난 야곱이 해가 진 후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는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사닥다리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 사역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영적 사닥다리가 되시사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열결해주시는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가 가진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1 태초에 1)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2)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3)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4)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4)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5)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정직한 제자 나다나엘 (요한복음 1장 43-51절)
정직한 제자 나다나엘 (요한복음 1장 43-51절)
세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무인도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 세 친구는 그 날부터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그리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대하던 응답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들의 소원이 뭐냐 딱 한가지씩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 1. 제가 없어지고 저희 집은 아마 매일 슬픔에 잠겼을 겁니다. 저를 집에 보내 주세요. 뽕하고 사라졌습니다. 2. 저도 저의 가족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집에 보내 주세요 뽕하고 사라졌습니다. 3. 저는 집이 없습니다. 저를 반겨줄 가정도 아내도 없습니다. 여기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심심할 것 같습니다. 아까 그 친구들 다시 오게 해주세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어떤 친구가 진실한 친구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어떠한 친구를 사귀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빌립은 가슴이 뜨거워 이 복음을 전하려고 누구를 찾습니까? 나다나엘을 찾았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선지자 요셉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친구가 있으신 분들은 참으로 인생의 반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귀한 것을 찾았을 때 혼자 누리기에 너무 귀해서 사랑하는 친구와 나누기 원했던 사람입니다. .
사복음서 보시면 열두 제자의 명단을 각 복음서 마다 기록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두사람의 이름이 항상 같이 붙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빌립과 바돌로매………바돌로매는 나다나엘의 다른 이름입니다. 얼마나 보기좋은 친구의 모습입니까? 성경에는 이러한 친구들이 또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또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바울과 바나바……….베드로와 요한……..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많아 지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옆사람 보시면서 동균이와 000
오늘은 이렇게 좋은 친구 덕분에 예수님을 알게 되어 12제자의 반열에 들게된 나다나엘 다른 이름으로는 바돌로매라는 한 제자의 삶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이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그는 편견과 선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는 어느정도 성경지식을 가지고 하는 대화였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전도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라고 합니다. 나다나엘 대답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사람은 성경을 암기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에 해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메시야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베들레헴은 유대에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나사렛에는 가구가 140 여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마을 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나올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조금 안다고 하는 성경지식이 우리의 믿음을 가로 막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화가 나무 아래서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지금 눈 앞에 있는데도 편견에 사로잡혀 메시야가 어떻게 이런 촌 구석에서 나올 수 있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방법을 자기의 방식으로 맞추어 놓고 이런 방식으로 오시지 않으면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견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야기 가운데 우리는 간혹가다 상대방의 혈액형을 물어 봅니다. A형이라 하면, 내성적이라 하고, O형이면, 스포츠 잘해, AB형이라하면 천재 아니면 바보,………때로은 자기중심적이고, 잘난체 하고, 하고 그러면 슬쩍 혈액형을 묻습니다. B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합니다.
몇 년전에 한국에서 B타입의 남자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그러나 장점도 있습니다. 때로는 로맨틱한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혈액형으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미리 판단하는 죄를 범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사람의 외모로 판단을 합니다. 머리가 꼽슬이면 성깔이 어쩌구….최씨 성을 가진 사람은 고집이 어떻구 …..우리는 좀 편협한 성경에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주님은 변화시키시고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감추시고 강점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이 편협한 나다나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의 약점을 드러내시기 보다는 그의 칭찬받을 만한 것을 드러내셔서 그것을 개발하도록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4강에 올라가는 신화를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당시 선수들보다 더 유명세를 탄 사람이 있었는데, 히딩크라는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예리한 분석으로 선수들의 강점을 드러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국 축구는 체력은 강한데 기술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딩크는 정 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기술은 수준급인데 체력이 오히려 약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선수들은 감독이 시키는대로 해서 왼쪽공격 하라면, 왼발쓰고, 오른쪽공경시키면, 오른발 쓰고, 나이가 어리면, 풀백을 보다가, 실력이 늘면 공격을 맡깁니다. 그래서 한국 선수는 멀티 포지션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선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격이면 처음부터 공격만 합니다. 수비수면 처음부터 수비만 시킵니다. 그래서 히딩크는 이점을 발견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상대방의 약점이 보이면 드러내기 보다는 대신 그의 강점을 찾아서 일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약점은 강점의 그늘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사람은 새신자부 담당해야 합니다. 친교시간에 음식맛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사람은 친교담당 해야 합니다. 음식맛을 탓하는 그 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오시면 지저분한 것이 다른사람의 눈에 띄지 않지만 유독 잘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분은 관리 담당해야 합니다. 예배가 순서가 왜이래 하며 불평하면, 이사람은 예배를 보는 눈이 다른사람보다 뛰어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담당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약점을 자꾸 들춰 내봤자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하는 것을 잘한다하여 격려하며 그것을 개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제가 이제 이교회에 온지 한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서서히 약점이 보이실 것입니다. 감사한것은 아직까지 저의 약점을 저에게 이야기 하는 성도가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없는 자리에서 할 수 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우리교회는 모두는 서로간에 약점을 가리워주는 성도를 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이시간에 옆에분 보시고 한가지만 칭찬해 주세요. 부부면 더욱 좋습니다. 당신에 무엇 무엇 강점이며 참 감사합니다 (먼저 사역하던 교회에서 한가씩 칭찬하라는데, 제 옆에 앉은 여자 집사님이 잘 생겨서 감사합니다.)
3. 나다나엘은 주님 만나는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무화가 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도 읽으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를 보시면 둘의 대화의 초점은 메시야 어디서 어떻게 오시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 하실 때 그즉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합니다.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서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왜 아직도 오시지 않는 것일까? 광야에서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왔다고 외쳐 대는데, 정말 주님은 오신것인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그때 그를 찾아가서 무화과 나무아래서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나다 네가 나를 그토록 생각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메시야를 만나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고백,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기던 그 고백, 주님 만나면 이 고백을 드려야지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임금입니다”
여러분 이 어지러운 시대가운데 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기다리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9장 28절에 예수님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신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도 나다나엘처럼 기다리는 자에게 나타나셨듯이, 재림으로 오실 예수님도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있는 성도는 주님이 오심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깨어 있으면 주님 다시 오심을 볼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둠속에 있습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개구리 실험을 했습니다. 찬물의 비이커 안에 개구리 한마리 넣고 비이커 밑에 알코올램프의 불을 붙여 서서히 가열하여 개구리의 반응을 살핍니다. 처음에서 헤엄을 치며 놀기 시작합니다. 점점 따뜻해지는데 오히려 그 따뜻한 온도의 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순간 이상하다 하여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Boiled Frog Syndrome) 지금 이순간이 좋아 잠들어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보라 신랑이로다 하며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구름을 타고 오시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결론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세자루의 칼로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주를 위해 충성하다 결국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을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도 나다나엘 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충만하셔서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를 뵙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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